아이에게 그림책을 읽어준다.
아들의 관심사는 여느 남자아이들의 궤적을 충실히 따라간다. 한동안은 자동차였다. 그러더니 어느 날 공룡으로 갈아탔다. 갈아타는 속도가 웬만한 환승역 못지않다.

어머니 말씀으로는 나도 그랬단다. 자동차 이름을 줄줄 꿰고, 공룡 이름을 줄줄 외웠단다. 피는 못 속인다더니, 취향도 못 속이나 보다.
공룡 이름이라는 게 어디 만만한가. 아르젠티노사우르스, 브라키오사우르스, 아크로칸토사우르스…. 어른 혀로는 한 번에 넘어가지 않는 이름들을 아이는 랩 하듯 쏟아낸다. 신통방통하다.
책은 친절하게도 공룡을 식성별로 나눈다. 풀을 먹는 초식 공룡, 고기를 먹는 육식 공룡, 그리고 이것저것 가리지 않는 잡식 공룡.
그때 아들이 불쑥 말했다.
"아빠, 나는 잡식이야."
"왜?"
"골고루 먹으니까."
빵 터졌다. 그러고 보니 어린이집, 유치원에 부모 상담을 갈 때마다 듣던 말이 있다. 우리 아들이 반에서 '골고루 대장'이라는 것. 편식 없는 아들이 그저 예뻤는데, 정작 본인은 그 미덕에 스스로 이름을 붙여버린 것이다. 잡식이라고.
어른의 사전에서 '잡식'은 썩 반가운 단어가 아니다. '잡(雜)'이라는 글자부터가 그렇다. 잡념, 잡음, 잡동사니, 잡탕. 뭔가 뒤섞이고, 정돈되지 않고, 순도가 떨어지는 느낌이다. 그래서인지 '잡식'이라는 말에는 가리는 것 없이 아무거나라는 뉘앙스가 슬쩍 묻어난다.

그런데 아이의 사전에서 잡식은 '골고루'의 다른 이름이었다. 단어가 달라진 게 아니다. 단어를 바라보는 눈이 달랐을 뿐이다.
출퇴근길 지하철에서 그 장면이 자꾸 떠올랐다. 그러다 생각이 엉뚱한 데로 번졌다.
커리어에도 잡식이 있지 않을까.
마침 영어로 일은 잡(job)이다. 잡식(job食). 말장난이지만, 영 틀린 말도 아니다.
직장 생활을 하다 보면 피할 수 없는 질문이 있다. 한 우물을 팔 것인가, 여러 우물을 팔 것인가. 하나의 직무에 천착해 깊이 내려가는 길이 있고, 여러 직무를 두루 거치며 넓게 뻗어가는 길이 있다. 직무는 같아도 금융에서 유통으로, 건설에서 IT로 산업을 넘나드는 사람이 있고, 한 산업 안에 뿌리를 내리고 자라는 사람도 있다. 초식이냐 육식이냐처럼, 저마다의 식성이 있는 셈이다.
나는 어떤가. 사실 나는 오래도록 기자를 꿈꿨던 사람이다. 그리고 큰 준비 없이도 유수 언론사 시험에 덜컥 합격했다. 그런데 묘한 일이었다. 막상 합격증을 손에 쥐고 나니 그때부터 뒤늦은 진로 고민이 시작됐다. 유학을 가야겠다고 마음먹었고, 남들이 선망하던 방송사 보도국을 제 발로 나왔다.
그 뒤 대기업에 다니며 유학을 알아봤다. 하지만 현실적인 제약이 하나둘 쌓였고, 고민은 자꾸 유예됐고, 그 사이 결혼과 육아라는 큰 파도가 밀려왔다. 눈 떠보니 10년 넘게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 팀장도 됐다. 그렇다고 지금이 나쁘다는 얘기는 아니다. 계획대로 흘러온 길은 아니어도, 흘러온 자리가 제법 괜찮다.
그사이 이직은 많지 않았다. 한 직무를 나름대로 깊게, 오래 해왔다고 자부한다. 그러면서도 다른 직무를 겸직의 형태로 꽤 많이 맡아왔다. 그 겸직의 자리에서 새로운 제안이 오기도 했고, 뜻밖의 기회가 생기기도 했다. 대학원에 다니면서는 또 다른 세계를 보는 눈이 뜨였고, 글을 쓰면서는 생각지도 못한 문이 열렸다. 어느 한 접시도 버릴 게 없는 식단이었던 셈이다.
물론 그럴 때마다 스스로에게 묻곤 했다.
나는 대체 뭘 하는 사람인가. 한 가지에 진득하게 집중하지 못하는 건 아닌가. 명함 한 장에 다 담기지 않는 이력은 때로는 자부심이었다가, 때로는 불안이었다.

돌이켜보면 이력서를 읽는 쪽도 비슷했을 것이다. 직무 한 줄로 요약되지 않는 이력 앞에서 우리는 종종 '전문성 부족'이라는 꼬리표부터 떠올린다. 하지만 그 이력서의 행간에는 낯선 일 앞에서도 숟가락을 먼저 드는 사람이 숨어 있을지 모른다.
그런데 해맑게 "나는 잡식"이라고 선언하는 아이를 보며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편식하지 않는 식습관이 건강의 비결이듯, 이것저것 맛본 경험이 커리어의 영양소가 될 수도 있겠다고.
HR에서 오래 써온 ‘T자형 인재'라는 말도 결국 같은 이야기다. 세로획은 한 우물의 깊이이고, 가로획은 여러 접시를 맛본 넓이다.
요즘은 '커리어 패스(path)'라는 말과 나란히 '커리어 포트폴리오'라는 말도 자주 들린다. 패스가 하나의 선이라면, 포트폴리오는 여러 개의 점이다.
스티브 잡스(이름부터 '잡'스다)는 스탠퍼드 졸업 연설에서, 점들은 앞을 내다보며 이을 수 없고 뒤돌아볼 때에야 비로소 이어진다고 했다. 대학 시절 기웃거린 서체 수업이 훗날 매킨토시의 아름다운 글꼴로 이어질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 수업도 당시엔 영락없는 '잡식'이었을 테다.
오해는 없길 바란다. 한 우물보다 여러 우물이 낫다는 얘기가 아니다. 한자리에서 묵묵히 깊이를 쌓는 초식 공룡의 우직함도, 한 분야를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육식 공룡의 집요함도 모두 귀하다. 각자의 식성은 곧 각자의 생존 전략이다.
다만 이것저것 해보고, 이것저것에서 기회를 찾는 일이 결코 '산만함'의 동의어는 아니라는 것. 잡식에도 나름의 기회와 의미, 그리고 가치가 있다는 것. 그 말을 하고 싶을 뿐이다.
"골고루 먹으니까 잡식이야."
아들의 이 한마디가 꽤 오래 남는다. 어쩌면 아빠의 커리어 식단을 가장 정확하게 진단해준 사람은 집에 사는 꼬마 영양사였는지도 모르겠다.
오늘 저녁에도 아들은 밥 한 그릇을 싹싹 비울 것이다. 나는 내일도 새로운 일을 기꺼이 맛보며 나만의 식단을 채워갈 것이다.
부자(父子)가 나란히, 잡식 공룡이다.
김민석 <일하는 사람을 위한 ESG적 생각> 저자 / listen-listen@nat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