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저는 기운이 없습니다. 이 이야기를 오프피스트에 적는게 맞는지 고민도 많이 했습니다.
하지만 너무나 공유하고 싶은 책과 교훈이 있어서 조심스럽지만 남겨보려 합니다.
저는 "인간 비타민", "걸어 다니는 골든 리트리버" 를 상징하는 ENFP 성향을 가진 사람입니다. 회의실에 들어서면 먼저 농담을 건네고,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참지 못하고 말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제가 요즘은 말을 잃어버렸습니다. 마음이 자꾸 무거워지고, 나라는 사람이 누구였는지 정체성이 흐릿해졌습니다.
큰일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올 초 직무가 바뀌었을 뿐이고, 새로운 업무를 맡아야 해서 리더의 자리에서 내려왔고,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바뀌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20년 동안 회사에 다니며 쌓아 온 '나'라는 존재가 어디론가 사라진 것 같았습니다. 익숙하던 자리에서 빠져나오니 제가 무엇을 잘하는 사람이었는지, 어디서부터 무엇을 어떻게 해야하는지 조차 잘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지난 달 여행 중의 한 카페에서 책 한 권을 우연히 집어 들었습니다.
백희나 작가의 그림책 『해피버쓰데이』(2024)였습니다. 아이들을 위한 그림책이 어른인 제게 이렇게 큰 위로가 될 줄은 몰랐습니다.
주인공은 얼룩말 제브리나입니다. 제브리나는 요즘 기운이 없습니다. 마음이 무거워 집에만 머뭅니다. 갈기는 푸석하고 눈은 퀭합니다. 집 안의 식물들도 그녀처럼 시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경주마용 눈가리개를 쓰고 있습니다.

그 눈가리개에서 한참 눈을 떼지 못했습니다. 눈가리개는 옆도 뒤도 보지 않고 앞만 보며 달리도록 하기 위해 쓰는 물건이었습니다. 우리는 경주마처럼 다음 목표, 다음 프로젝트, 다음 성과. 그렇게 달리다 보면 어느 날 갑자기 멈춰 서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지쳐서가 아니라, 다 써 버려서입니다. 책 속 제브리나의 자리에 제 이름을 넣어 읽어 보았습니다. 이상할 만큼 꼭 맞았습니다. 제브리나는 바로 저였습니다.
기운 없는 제브리나에게 막내이모가 생일 선물을 보냅니다. “띵동~ 커다란 택배가 도착했습니다.” 막내이모는 조금 별난 사람입니다. 어디서 무얼 하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래도 제브리나는 이모를 아주 좋아합니다.
이모가 보낸 것은 커다란 옷장이었습니다. 함께 온 편지에는 완벽하진 않지만 신기한 옷장이니 하루에 한 벌씩 꺼내 입으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옷장에는 매일 새 옷이 한 벌씩 걸립니다. 그 옷을 입으면 그 옷에 꼭 맞는 하루가 펼쳐집니다. 제브리나는 꽃동산 나들이를 가고, 은쟁반 찻집에서 차를 마시고, 미뤄 두었던 묵은 청소를 합니다. 그렇게 온전히 자신을 돌보는 데 하루를 쓰다 보니, 어느새 눈가리개를 쓰지 않아도 되게 됩니다.
저는 이모가 보낸 것이 옷이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모가 보낸 것은 '오늘 하루만큼은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쓰지 말고 진짜 소중한 너 자신을 돌보라'는 권면같았습니다. 인생을 한 번에 바꿔 줄 해답이 아니었습니다. 딱 하루치 용기였습니다. 맞습니다. 저에게 필요한 것은 미래를 위한, 재도약을 위한 힘이 아니라 오늘을 멋지게 살아낼 하루치 용기였습니다.
무엇보다 책에서 저를 가장 오래 붙잡은 것은 제브리나가 하루를 마치고 갈아입는 잠옷에 대한 짧은 문장이었습니다.
" 제브리나는 따끈하게 목욕을 한 뒤, 잠옷으로 갈아입었습니다. 잠옷은 낡았지만, 오래 입은 만큼 몸에 꼭 맞고 편했습니다. "
이 문장을 읽고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알았습니다.
제가 듣고 싶었던 말이 바로 이것이었다는 것을요.
새 직무, 새 동료 앞에서 저는 계속 새 옷이 되려고 애썼습니다. 빠르게 적응하고, 새로운 방식에 맞추고, 내가 얼마나 쓸모있었고 앞으로도 쓸모있는 사람인지를 빠르게 증명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20년을 일한 저는 새 옷이 아닙니다. 낡았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조금 늙기도 했습니다. ㅎㅎ
하지만 오래 입은 만큼 몸에 꼭 맞습니다. 이 회사에서 오래도록 헌신한 사람들과의 끈끈한 관계, 사람의 마음을 읽는 감각, 조직이 흔들릴 때 무엇부터 챙겨야 하는지 아는 경험, 위기와 기회 앞에서 일희일비하지 않고 기다리는 침착함. 이런 것들은 새 옷에서는 나오지 않습니다. 오래 입어야만 생기는 편안함입니다. 저는 그런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인정받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시들어 가던 제 일상에 따뜻한 햇살과 시원한 물 한 잔을 건네준 분들이 있습니다. 바로 KPC 자격을 준비하며 만난 코치님들입니다.
신기한 일입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생전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분들이 저를 응원하고 지지해 주었습니다. 상한 마음에 깊이 공감하고, 제 단점을 지적하며 고치려 하지 않고, 그저 제 말에 경청해 주었습니다. 저의 강점을 궁금해하고, 그 강점을 발휘할 수 있도록 용기를 불어넣어주었습니다. 그 덕분에 저는 다시 일어설 용기를 낼 수 있었습니다.
돌아보면 그분들은 제브리나의 막내이모를 닮았습니다. 어디서 무얼 하는지 잘 모르는, 조금은 먼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거리 덕분에 위로가 가능했던 것 같습니다. 가까운 사람에게는 "괜찮아?"라는 말 앞에서도 괜찮은 척을 하게 됩니다. 저를 판단할 이유도, 기대할 이유도 없는 사람 앞에서야 비로소 무겁다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코치님들도 답을 주지 않았습니다. 인생을 바꿀 해법 대신 질문 하나, 공감 한마디를 건넸습니다. 하루에 한 벌씩. 그게 전부였고, 그걸로 충분했습니다.
이 글을 읽는 분들 중에도 요즘 기운이 없는 분이 계실 겁니다. 직무가 바뀌었거나, 동료가 바뀌었거나, 아니면 시니어가 되면서 점점 설 자리가 좁아지는 저와 같은 분들이 혹~시나 계실 수도 있고,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는데 마음만 무거워졌을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아직 눈가리개를 쓰고 앞만 보며 달리는 중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두 가지를 여쭙고 싶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이런 막내이모 같은 사람이 있나요? 멀리 있어도, 조금 별나도,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내가 시들어 갈 때 하루치 옷 한 벌을 건네주는 사람 말입니다. 있다면 오늘 그분께 고맙다고 한마디 전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아직 없다면, 그런 사람을 찾는 일 자체가 나를 돌보는 첫걸음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누군가에게 이런 막내이모가 되고 있나요? 요즘 유난히 말수가 줄어든 동료, 새 부서에서 혼자 점심을 먹는 후배, 자리를 옮긴 뒤 표정이 어두워진 선배가 떠오를지도 모릅니다. 거창한 조언은 필요 없습니다. "요즘 어때요?" 한마디, 따뜻한 차 한 잔이면 충분합니다. 완벽하지 않아도 됩니다. 막내이모의 옷장도 완벽하지 않았으니까요.
책 속 제브리나의 집에는 유니콘 그림이 여기저기 걸려 있습니다. 시들어 있던 순간에도 그녀가 꿈을 버리지 않았다는 뜻일 겁니다.
저도 아직 꿈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조금 푸석하고, 조금 낡았고, 말수도 줄었습니다. 하지만 오래 입은 잠옷처럼, 저는 여전히 어딘가에서 누군가에게 꼭 맞고 편한 사람일 수 있다고 믿어 보려 합니다.
그리고 이제는 제가 누군가의 막내이모가 되어 볼 생각입니다.

출처: 백희나, 『해피버쓰데이』, 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