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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지금 다니고 있는 직장이 저의 첫 직장입니다. 2006년에 입사해 20년 동안 이곳 외에 다른 직장을 경험해 본 적이 없습니다. 대학 시절 공장이나, 카페, 옷매장, 휴게소 등 온갖 아르바이트를 해봤지만, 제 평생 한 직장을 다니게 될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솔직히 저를 이곳에 머물게 하는 것은 여러 기회비용입니다. 고향인 지방에서 평생 살아온 제가 기회가 널린 수도권으로 삶의 터전을 옮기는 일, 그리고 이곳에서 쌓아온 사람과 관계를 대체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가장 큽니다. 그래서일까요. 문득 이런 질문이 올라옵니다.

그 질문을 품고 있으며 답을 찾지 못하고 있던 때, 「언더커버 셰프」를 만났습니다.
저의 힐링은 TV 프로그램입니다. 예능, 드라마를 넘나들며 삶에 정말 많은 재미와 교훈을 주기 때문입니다.
'일류 셰프들은 계급장 없이도 인정받을 수 있을까?'라는 도발적인 기획의도가, 마치 제 마음속 물음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 같았습니다.
우리나라 최정상 셰프들이 자기 요리의 뿌리가 된 본토로 향합니다.
그런데 오너 셰프가 아니라 현지 식당의 '주방 막내'로 위장 취업을 합니다. 화려한 경력도, 이름값도, 후광도 모두 OUT. 끝없는 재료 손질과 보조일들 속에서 그들에게 허락된 무기는 단 하나, '실력'뿐이었습니다.
주어진 시간은 단 5일. 그 안에 막내에서 메인 셰프까지 올라가, 자신의 시그니처 메뉴를 현지 메뉴판에 올려야 했습니다.
저는 이 프로그램을 보며 통쾌한 대리만족을 느꼈습니다. 너무 유명한 파스타 셰프로 그를 모토로 한 드라마까지 있는 셰프, 중식여왕이라는 별명을 가진 셰프, 그리고 흑백요리사에서 100명을 뚫고 우승한 셰프가 낯선 본토 주방에 막내로 던져지는 모습을 지켜보는 재미도 컸지만, 무엇보다 도전이 되었습니다.
나도 저렇게 어디서든 다시 최고의 자리까지 올라갈 수 있지 않을까. 내 능력도 이곳에서만이 아니라, 어디서든 통용되고 존중받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조금씩 자신감이 차올랐습니다.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이탈리안의 샘 킴, 중식의 정지선, 서바이벌 우승자 권성준. 세 사람 모두 단 5일 만에 막내에서 메인 셰프의 자리까지 올라갔습니다. 낯선 언어와 낯선 주방 속에서도 실력은 결국 계급장을 이겼습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마지막 관문인 '메뉴 등재'에서는 셋 다 실패했습니다.
그리고 실패의 이유가 세 사람 모두 똑같았습니다.
샘 킴은 표고버섯 크림 리소토로 두 나라의 맛을 결합한 아이디어와 감칠맛을 인정받았지만,
사장은 "이탈리아의 맛은 아니다. 우리 식당 맛의 스펙트럼에도 속하지 않는다"라고 했습니다.
정지선은 반나절 만에 신메뉴 여섯 개를 쏟아내며 할머니 사장의 호평까지 받았지만,
연회장 사장단은 "정통 사천요리의 깊이에 미치지 못했다"고 평했습니다.
권성준은 아예 나폴리 정통 봉골레로 정면 돌파했지만,
사장은 "맛의 밸런스와 과정은 110점"이라 극찬하면서도 "우리다움이 전혀 없는 요리"라며 선을 그었습니다.
실력으로 메인 셰프까지는 올라갔습니다. 그러나 나폴리, 파르마, 사천이라는 수백 년 뿌리 위에 하루아침에 한국 셰프의 색깔을 얹기란, 그들의 표현대로 "넘어갈 수 없는 장벽"이었습니다.
이 대목에서 예전에 모셨던 사장님께서 승진자 교육 때 하셨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능력이 뛰어난 경력직은 어디서나 사랑받습니다. 서로 모셔가려 합니다. 하지만 정통성 있는 조직에서 그런 사람을 조직의 차세대 리더로, 임원으로 세우기는 쉽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 조직에서 깊이 뿌리 내리는 것이 결국 자신의 미래를 위한 좋은 선택이다’라는 조언이셨습니다.
그것 또한 저는 하나의 정통성일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언더커버 셰프」는 바로 이 진실을 정확히 보여주었습니다. 실력은 어디서나 문을 열어줍니다. 그러나 그 집의 '기준'을 새로 쓰는 자리에 앉는 것은, 실력만으로는 안 되는 또 다른 이야기입니다. 실력은 계급장 없이도 인정받게 하지만, 정통성은 그 조직의 시간을 함께 견뎌낸 사람에게만 열리는 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답을 골라야 할까요.
한편으로는 분명합니다.
이름값도 후광도 통하지 않는 낯선 곳에서 인정받으려면, 어디서든 통하는 '뾰족한 전문성', 나만의 Specialty를 갖춰야 합니다. 3명의 셰프가 5일 만에 메인 자리까지 오를 수 있었던 힘도 결국 계급장이 아니라 실력이었으니까요. 한 조직에만 최적화된 능력은 위태롭습니다. 언제든 계급장을 떼도 통하는 실력, 그것이 진짜 나의 자산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연봉만 좇아 여기저기 '퐁당퐁당' 옮겨 다니는 것이 정답이라고도 말하기 어렵습니다. 정통성은 짧은 시간에 만들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폴리의 봉골레가, 사천의 매운맛이 수백 년을 쌓아 온 것처럼, 한 곳에 뿌리내려 그 조직의 시간과 맥락을 온몸으로 통과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신뢰가 분명히 존재합니다. 20년을 한자리에서 견뎌 온 저 같은 사람에게는, 사실 그 뿌리가 가장 큰 힘이기도 합니다.
저는 이제 이 질문의 답을 조금 달리 세워봅니다. '실력이냐 정통성이냐', '떠날 것이냐 남을 것이냐'는 애초에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3명의 셰프가 실패한 것은 실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남의 정통성 위에 자기 것을 얹으려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진짜 질문은 이것입니다.
한 곳에 뿌리내리되 우물 안에 갇히지 않는 것, 뾰족한 전문성을 갈고 닦되 그 조직의 정통성까지 내 것으로 소화해 내는 것. 그 둘을 동시에 해내는 사람이야말로, 남아도 강하고 떠나도 강한 사람일 것입니다.
계급장을 떼도 인정받을 수 있을까. 저는 이제 이 질문이 두렵지 않습니다. 오히려 매일 저에게 던지는 건강한 점검이 되었습니다. 오늘 내가 하는 일이, 이 회사의 명함이 사라져도 여전히 나를 나이게 하는 실력인지. 그리고 그 실력 위에, 20년의 시간이 준 나만의 정통성이라는 육수가 진하게 배어 있는지.
그것이 준비된 사람에게는, 떠남과 남음 모두 두려움이 아니라 선택이 됩니다. 그리고 그 선택의 자유야말로, 우리가 평생 갈고닦아야 할 진짜 커리어의 실력이 아닐까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