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 아이 전화번호는 기억이 나지 않아요.
logo
Original

둘째 아이 전화번호는 기억이 나지 않아요.

AI 시대, 사고력을 잃는 것 아닐까
Tech HR주니어취업준비생미드레벨신입/인턴시니어리더임원CEO
rk
MarkAug 25, 2026
803

지금 휴대폰을 덮어두고 떠올릴 수 있는 번호는 네 개네요. 아내, 어머니, 본가 집 전화. 그리고 첫째 아이.

첫째 아이 번호가 외워진 건 노력해서가 아닙니다. 제 번호와 아내 번호가 섞여 있는 조합이라 기억을 하지요. 그래도 가끔은 앞뒤가 헛갈립니다. 정말 미안한건 둘째 아이 번호는 매번 기억이 안납니다. 매일 얼굴을 보고 매일 이름을 부르는데 전화번호가 기억이 안나네요.

핸드폰이 생기기 전을 생각해보면 한 50개 정도 번호를 외우고 있었던거 같아요. 과방에서 자주 시키면서 스티커를 완성해가던 중국집 전화번호까지도 외웠으니까요. 스마트폰 이전의 휴대전화를 피처폰이라고 부른다지요? 스마트폰이 생기기 전에는 그 전화가 핸드폰이었는데 말입니다.

이제 제가 알고 있는 전화번호는 4개입니다. 여러분도 그러신가요?

전화번호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 이걸 두고 인류의 기억력이 퇴화했다며 걱정하는 사람을 보신 적 있나요?

같은 행동인데 다르게 느껴지네요

요즘 AI가 사람을 게을러지게 만든다는 걱정을 자주 봅니다. 저도 그 걱정을 품고 있었어요. AI를 쓰면서 사고하는 힘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가 한동안의 고민이었고, 특히 아이를 키우다보니 그런 고민이 많이 듭니다. 잘 모르는 수학문제를 어떻게 풀지 해설지를 봐도 모르겠으면 AI를 열고 카메라로 찍어서 보여주면 다 설명해주거든요.

채용을 진행해야 하는 상황을 가정해 보겠습니다. 예전 같으면 직무기술서를 뜯어보고 필요한 역량을 뽑아낸 다음 질문을 만들었을 겁니다. 지금은 공고를 붙여넣고 구조화된 면접 질문을 만들어달라고 합니다. 나온 결과를 조금 다듬어서 씁니다. 이럴 때 좀 찝찝하기는 합니다. 내가 생각을 안 하고 있구나 싶은 순간 순간들이 있지요.

반대의 경우가 있습니다. 저는 최근에 클로드로 프로그램을 하나 만들었습니다. 업무 과제를 하나 던지면 AI가 필요한 전문가 팀을 스스로 꾸리고, 순서를 정해 일을 진행하고, 검수까지 거쳐서 바로 쓸 수 있는 결과물을 내주는 프로그램입니다.

만든 방식은 이렇습니다. 참고할 만한 깃허브 주소를 클로드에 알려줍니다. 클로드가 뭘 만들고 싶은지 묻습니다. 저는 대답합니다. 폴더를 어디에 둘지 몇 가지를 지정합니다. 그다음부터 제가 하는 일은 단 한 종류뿐입니다. 나온 결과물을 보고 이건 이래서 부족하다, 나는 이런 쪽으로 갔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것.

저는 개발자는 당연히 아닐뿐더러 코딩은 국민학교 시절에 GW베이직 한달 다닌 기억뿐인데요. 클로드가 터미널을 열라고 했는데 ‘터미널’이 뭔지 몰라서 다시 물었던 인물이지요. 코드는 지금도 여전히 한 줄도 못 읽습니다. 그런데 이건 뿌듯합니다. AI를 잘 쓰고 있다고 느낍니다.

두 상황을 나란히 놓고 보면 제가 한 일은 똑같습니다. 원하는 걸 말하고, 나온 결과를 보고, 고쳐달라고 하는 것. 한쪽에는 찝찝하고 다른 한쪽은 성취감이 생깁니다. 문득 떠올랐습니다. 찝찝함은 결과물의 품질에서 온 게 아니라 제가 잘 아는 영역에서는 결과물이 제 실력의 증거여야 한다고 믿고 있었던 겁니다. HRer로서 정체성이라 생각한거죠. 코드는 애초에 제 정체성이 아니니까 터미널을 몰라도 그건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이고요.

AI를 활용한 팀원의 결과물을 보면서

팀원이 교육기획보고서를 가져왔을 때 ‘AI로 만들었구나’ 느껴질 때가 있었습니다.

문서 자체는 흠잡을 데가 없었습니다. 목차도 깔끔하고 목표도 뚜렷했죠. 하지만 이 과정이 실제 현장에서 어떻게 굴러가는지에 대한 그림이 하나도 없었죠. 첫날 오후 3시에 아웃도어프로그램을 배치하면 입사 이틀째 사람들이 어떤 표정으로 앉아 있을지, 이번 달처럼 세 명이 들어올 때와 스무 명이 들어올 때 이 실습이 같은 효과가 있을 수 있는지. 그 시점에 책상배치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 어떤 기자재가 필요하고, 투입된 인력들은 어떤 목표를 가지고 움직이는지 등 진짜 필요한 정보들은 안개 속에 있었습니다. 그럴싸한데 쓸 수 없는 물건을 가지고 온 거죠. 결론은 실제로 이게 돌아가는 장면을 상상해보면서 구체화하라고 피드백했습니다.

그 순간 두 개의 생각이 동시에 지나갔습니다. 이성적으로는 AI를 쓴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라고 판단했습니다. 문제는 시뮬레이션이 없다는 것이었으니까요. 그런데 감정적으로는 '직접 한 게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스쳤습니다.

제가 저 자신에게 씌우던 찝찝함과 같은 종류였습니다.

이게 전화번호랑 뭐가 다른가

소크라테스는 문자를 걱정했습니다. 사람들이 글에 기대면 기억하는 능력을 잃고, 안다고 착각하게 된다고요.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플라톤이 아니었으면 이토록 유명한 사람이 되지 못했을 겁니다. 아무런 글을 남기지 않았으니까요. 계산기가 교실에 들어올 때도 같은 논쟁이 있었습니다. 길눈 밝던 사람들이 지금은 자기 동네에서도 앱을 켭니다.

2011년 컬럼비아대 벳시 스패로우 연구팀이 Science에 발표한 연구가 있습니다. 검색엔진이 등장한 뒤 우리가 기억을 재편성하고 있다는 내용입니다. 나중에 다시 찾아볼 수 있다고 믿는 정보는 내용 자체를 덜 기억하는 대신, 어디로 가면 찾을 수 있는지를 더 잘 기억한다는 겁니다.

기억이 사라진 게 아니라 저장하는 대상이 바뀐 겁니다. 번호에서 위치로. 제가 외우던 50개의 전화번호를 잊어버리고 다른 전화번호를 외우지 않게 된 대가로 우리가 잃은 게 무엇인가요?

전화번호가 아니라 누구에게 전화를 걸 것인지

우리는 이제 전화번호를 핸드폰에 이름으로 저장을 합니다. 전화번호를 이제 모르지만 우리에게는 누구에게 전화를 걸어야 하는지는 똑같이 남아있습니다.

팀원의 설계안에서 부족했던 부분도 동일합니다. AI는 훌륭한 온보딩 문서를 만들어주었지만 이 과정을 왜 하는지, 첫 출근한 사람이 사흘 뒤 퇴근할 때 무엇이 달라져 있어야 하는지는 만들어주지 않습니다. 그건 연락처 목록에 없는 정보니까요.

AI가 면접 질문 열다섯 개를 뱉었을 때, 어떤 게 이 자리에 필요한 질문이고 어떤 게 지원자를 불편하게만 만드는 질문인지 고를 수 없다면. 그건 나태가 아닙니다. 실력이 없는 겁니다. 질문을 직접 타이핑했느냐는 중요한게 아닙니다.

목적에 충실한 작업을 하자

그래서 그냥 쓰기로 했습니다. 이게 진짜 내 실력일까?라는 고민도 사치인 것 같습니다.

내가 무엇을 원했는지, 나온 결과가 거기에 닿았는지. 이 두 가지가 충실하면 그 목적이 충족됩니다.
이게 내 것일까? 진짜 내 것이 세상에 있느냐? 이런 철학적인 질문은 휴가철에 하려고 합니다.

과정에서 제 손이 몇 번 움직였는지를 성실함의 척도로 삼는 습관은 내려놓으려 합니다.

팀원에게도 같은 기준을 쓰야겠죠? AI 티가 나는지가 아니라 이게 현장에서 작동하는지를 봐야 합니다.

오늘 퇴근 길에 둘째 아이에게 전화를 걸 겁니다. 번호는 여전히 모르겠지만 전화는 걸 수 있습니다.


rk
Mark
#새로움 #텐션 #성장
당신에게는 늘 새로운 내일이 있고, 어제보다 성장하는 우리가 있습니다. 성장하는 당신을 응원하는 Mark입니다.

댓글0

댓글이 없습니다.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
(주)오프피스트 | 대표이사 윤용운
서울특별시 서초구 사임당로8길 13, 4층 402-엘179호(서초동, 제일빌딩)
사업자등록번호: 347-87-03493 |
통신판매업신고번호: 제2025-서울서초-2362호
전화: 02-6339-1015 | 이메일: help@offpiste.a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