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요일 오후, 식어가는 커피 잔 앞에 앉아 습관처럼 빈 화면을 마주합니다. 올해는 어디로 가고 있는지, 나는 어떤 글을 쓰며 사는지 묻다 보면 결국 질문은 하나의 본질로 수렴합니다.
‘나는 어떤 어른이 되고 있는가?’
이 질문의 끝에는 언제나 서늘한 결론이 놓입니다. 모든 흐름의 시작은 ‘나’여야 한다는 것. 조직의 직함이나 시장의 논리, 타인의 기대에 나를 맞추다 보면 어느 순간 길을 잃습니다. 나 자신에게서 출발하지 않은 삶은 언제나 흔들리기 마련입니다.
요즘 내가 ‘어른’이라는 단어를 가장 뼈아프게 실감하는 순간은 고등학교 2학년이 된 아들과 대화할 때입니다. 한때 내 손을 잡아야만 길을 건너던 아이가, 이제는 뉴스를 보며 사회의 모순을 묻고 사람들의 선택에 대해 제법 묵직한 질문을 던집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말을 아낍니다. 아이에게 무엇을 가르치느냐보다, 내가 어떻게 살아가느냐가 더 무거운 가르침이라는 걸 알기 때문입니다. 아이는 아버지의 입이 아니라 뒷모습을 보고 배운다고, 나는 믿습니다.
하지만 어른의 길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가치가 사정없이 흔들리던 시기도 있었습니다. 바로 돈이 없던 시절이었습니다. 하고 싶은 일을 한다고 자부했지만, 통장에 찍히는 숫자가 자존감의 척도가 되던 때였습니다. 아내 앞에서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말할 때마다 목소리는 작아졌고, “요즘 어때?”라는 친구의 평범한 인사는 “아직도 돈 못 벌어?”라는 추궁처럼 들려 마음을 찔렸습니다.
가장 후회되는 장면은 형과 어머니의 병원비 문제를 논의하던 날입니다. 나는 내 형편만 앞세웠습니다. “나도 지금 힘들어.” 그 한마디로 형의 입을 막았습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핸들을 잡은 손이 부끄러웠습니다. 형편보다 좁았던 건 나의 마음이었습니다. 어른이 된다는 건 완벽해지는 것이 아니라, 나의 유치함과 밑바닥을 목격하고 기꺼이 얼굴 붉힐 줄 아는 일임을 그제야 깨달았습니다.
피터 드러커는 일찍이 “조직이 개인의 길을 설계해주지 않는 시대에는, 개인이 스스로를 경영(Managing Oneself)해야 한다”는 통찰을 남겼습니다. 나는 이 문장을 거창한 경영 이론이 아니라, 어른으로서의 ‘책임’으로 받아들입니다. 누군가의 앞에 서기 전에, 먼저 자기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