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에서 인사팀장으로 일할 때, 글로벌 혹은 리전 프로젝트 끝날 무렵 유독 독일 직원들이 추천서 (reference letter/ recommendation letter)를 요청했었다. 같이 일하고 나서 "나랑 프로젝트해 보니 어땠는지 써줄 수 있어?"라고 물었다. 나는 사실에 기반하되 실제보다 부풀려서 좋게 써줬다. 다시 안 볼 사이도 아니고 어차피 앞으로 계속 같은 회사에서 일해야 하는데 좋은 게 좋은 거니까. 돈 드는 것도 아니고 말인심이니, 최대한 좋은 말로 포장해서 멋있게 써줬다. 추천서를 받아 든 사람들이 너무 좋아하니까 덩달아 나도 기분이 좋았다.
싱가포르나 중국 HR에게서도 가끔 연락이 왔다. "너 마커스(가칭)가 추천서 써달라는거 뭐라고 썼어? 양식 있어?" 그러면 나는 “어 내가 쓴 거 보내줄께” 라며 내가 작성한 추천서 (좋은말 대단치 1 pager)를 그대로 공유했다. 다들 대상자 이름만 바꿔서 돌려가며 잘 썼다.
한국에서 추천서는 석사나 박사 지원할 때나 받는다. 받아도 사실 크게 의미를 두지 않는다. 쓰는 사람도 읽는 사람도 어차피 좋은 말만 나올 거라고 알고 있다. 이직 때 첨부되어도 채용 담당자가 꼼꼼히 읽는 일은 드물고, 인사변동 공지에서 사람을 소개할 때도 비슷하다. 관례적으로 좋은 수식어를 붙이고, 그 문장은 읽히고 나면 곧 잊힌다. 좋은 말은 어디에 붙여도 좋은 말이니까.
예전에 독일 직원들이 나에게 왜 그렇게 추천서를 달라고 했는지, 받고나서 왜그리 좋아했는지 추천서의 의미를 독일에 오고나서 알게 됐다.
독일 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내가 담당하는 사업부의 직원이 다른 부서로 이동하게 되었고, 행정 절차상 회사에서 발급하는 서류가 근무평가서 (일종의 레퍼런스레터)였다.
독일 HR BP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무 좋은 말이나 다 갖다 붙이지 마. 이거 공문서야. 나중에 어떤 영향으로 결과가 돌아올지 몰라."
독일에서는 퇴사할 때 평가가 담긴 근무평가서(qualifiziertes Arbeitszeugnis)를 받는 게 직원의 법적 권리다(영업법 제109조). 이 문서는 다음 고용주가 채용 판단에 실제로 참고한다. 우리 회사만 봐도 정해진 템플릿이 있고, HR이 리뷰하고, 상사가 사인한다. 회사가 책임지고 내보내는 공문서이다.
독일에서는 근무평가서를 작성의 원칙이 있다. "wohlwollend, aber wahr", 호의적으로 쓰되 사실에 부합해야 한다는 것이다. 고용주는 퇴사자에게 불이익을 줄 수 없고, 동시에 사실과 다른 평가도 쓸 수 없다. 예전에 한국에서 내가 작성해서 독일 직원에게 선물처럼 전달한 추천서는 호의(wohlwollend)는 넘치는데 사실성(wahr)이 모자랐다.
어느 날 사내인트라넷 인사 발령 공지문에 자기 이름과 역할이 구체적으로 언급된 메일을 캡처해서 따로 보관하는 동료가 있었다. 그냥 승진한 것이 너무 신나서 기억하려고 저장했나 보다 생각했다. 나도 이직한 회사에서, 내 승진 어나운스 공지문을 저장했던 적이 있으니까.
나를 당황케 한건 그 직원이 나중에 본인 평가 결과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HR에 찾아와 따질 때 공지문 내용을 근거로 제시했을 때였다. 그 사람에게 그 캡처는 회사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증빙이었다. (그 인사발령 공지문은 내가 작성한, 최대한 말인심 좋게 작성한 공지문이었다)
한국에서 나는 관계와 평판으로 신뢰를 쌓는 방식에 익숙했다. 누가 나를 어떻게 기억하고 어떻게 말해주는지가 커리어를 움직였다. 독일에서는 문서와 코드가 그 역할을 한다. 말은 휘발되지만 서면에 남은 한 줄은 남는다는 전제가 사람들 머릿속에 깔려 있다.
독일 직원의 평가서를 한국에서의 관례대로 칭찬 위주의 자유기술서로 쓰면, 독일 그 직원은 다음 이직에서 의도치 않게 불리한 평가를 받을 수도 있다. 독일 채용 담당자에게 익숙하지 않은 코드라서 헷갈리게 되는 것이다. 내가 써서 여기저기 공유했던 추천서가 바로 그런 글이었다. 좋게 써주고 싶은 마음은 진심이었지만, 그 마음이 사실의 범위를 넘어 있었다.
독일에 와서 추천서와 공지문이 다르게 활용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되고 나서는 요즘은 누군가에 대해 글을 쓸 때 한 번 더 생각하게 된다.
덧붙이는 말.
서양, 특히 독일에서 추천서가 이토록 정착된 배경에는 중세 길드 문화가 있다. 당시 기술자들이 다른 도시로 이동해 일할 때, 이전 마스터가 작성해 준 신원, 기술 보증서 없이는 일자리를 얻을 수 없었던 데에서 유래했다.
깊은 역사적 맥락을 지닌 제도이지만, 현대에 이르러서는 법적 제한과 표현의 암호화로 인해 변별력이 상평준화되는 또 다른 고민을 낳고 있다. 표현의 암호화란, 직원이 추천서 문구에 불만을 품고 회사에 소송을 거는 케이스도 있어서 일종의 정형화된 안전한 문구를 사용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다른 채용담당자에게 사실을 전달해야해서 “그의 퇴사가 매우 아쉽습니다” 같은 문구가 있으면 실제 평가가 좋았다는것이고 “그의 업무에 우리는 만족했습니다” 는 사실은 별로였다 로 해석할 수 있다.
어떤 방식이 좋다 나쁘다를 떠나서 각국의 역사적 맥락을 이해하고 채용 시 서면 제도의 한계를 보완하는 실질적 검증 방식을 찾아가는 것이 우리 시대 HR의 과제가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