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R 담당자가 민법을 공부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요?
처음에는 저 역시 민법과 HR 실무의 거리가 꽤 멀다고 생각했습니다.
HR 업무에서는 근로기준법, 노동관계법령, 4대보험, 세법처럼 당장 업무에 적용해야 하는 법률이 훨씬 많습니다. 민법에서 배우는 대리권, 채권, 신의성실, 채무불이행 같은 개념은 시험을 위한 내용에 더 가깝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강의를 들으면서 생각이 조금 달라졌습니다.
민법을 HR 업무에 직접 적용한다기보다, 민법이 권리와 의무를 바라보는 방식을 HR 운영에 가져오면 꽤 많은 문제가 다르게 보였습니다.
누가 어떤 권한으로 이야기했는가.
상대방은 그 말을 어느 정도 신뢰했는가.
회사에서 정한 기준과 실제 운영은 일치했는가.
약속한 것은 제대로 실행됐는가.
생각해보면 우리가 HR에서 반복해서 마주하는 문제들도 대부분 이 질문에서 시작합니다.
채용 업무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후보자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가정해보겠습니다.
“연봉은 4,000만 원 정도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성과급까지 포함하면 이 정도 수준입니다.”
“입사일은 다음 달 1일로 보면 될 것 같습니다.”
HR 담당자 입장에서는 아직 협의 중인 내용을 전달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후보자는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현재 회사에 퇴사의사를 밝히거나, 다른 회사의 제안을 거절하거나, 개인 일정을 조정할 수도 있습니다.
즉 HR이 전달한 정보가 상대방에게는 하나의 의사결정 기준이 됩니다.
민법 강의에서도 최종합격자를 결정한 이후 여러 차례 발령을 연기하다가 결국 채용하지 않은 사례가 다뤄졌습니다. 계약이 최종적으로 성립하지 않았다는 사실만 보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에게 계약이 체결될 것이라는 신뢰를 형성했다가 이를 좌절시킨 과정 자체가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취지였습니다.
이 사례를 보면서 채용 프로세스를 다시 생각하게 됐습니다.
채용 리스크는 근로계약서를 쓰는 순간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후보자가 회사를 신뢰하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시작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HR에서는 ‘확정’과 ‘예정’을 생각보다 명확하게 구분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채용 단계를 후보자 검토 → 처우협의 → 내부승인 → 공식 offer → 입사
처럼 분리하고, 내부승인이 완료되기 전까지는 확정적인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 기준을 만들어두는 것이 필요합니다.
좋은 채용 경험은 친절한 커뮤니케이션만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정확한 커뮤니케이션에서 만들어집니다.
민법 강의에서 특히 HR과 연결해서 생각해볼 수 있었던 개념이 ‘대리권’이었습니다.
쉽게 말하면,어떤 일을 맡았다고 해서 그 일과 관련된 모든 결정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강의에서도 금전을 받을 권한이 있다고 해서 채무를 면제할 권한까지 당연히 인정되는 것은 아니며, 계약을 체결할 권한과 계약을 해제할 권한 역시 구분해서 봐야 한다는 내용이 다뤄졌습니다.
HR에서도 비슷합니다.
채용담당자는 후보자와 연봉을 협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최종 연봉을 확정할 권한까지 가지고 있는지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Payroll 담당자는 급여를 계산합니다.
그렇다고 임의로 급여항목을 만들거나 지급기준을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휴가관리자는 휴가를 승인할 수 있지만, 회사 규정에 없는 새로운 휴가를 임의로 인정할 수 있는지는 또 다른 문제입니다.
실무를 하다 보면 의외로 많은 문제가 여기에서 발생합니다.
담당자는 “그 정도는 내가 결정해도 된다고 생각했다”고 하고,
관리자는 “그것까지 승인한 것은 아니다”라고 이야기합니다.
결국 직원이나 후보자 입장에서는 회사 내부의 권한 구조를 알 수 없기 때문에 혼란이 발생합니다.
그래서 HR 운영에서는 업무분장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가 직무권한, 즉 권한 구조가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이렇게 구분할 수 있습니다.
누가 협의할 수 있는가
누가 검토할 수 있는가
누가 승인할 수 있는가
어떤 경우에 상위 승인이 필요한가
예외처리는 누가 결정하는가
정상적인 업무는 빠르게 처리하되, 예외적인 결정은 명확한 권한 아래에서 이루어지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HR에서 권한관리가 중요한 이유는 사람을 통제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회사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약속의 품질을 관리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번 강의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실무와 직접적으로 연결됐던 부분은 임금채권이었습니다.
강의에서는 임금채권의 양도 문제와 실제 지급 문제를 구분해서 설명합니다.
임금채권을 일반적인 채권과 똑같이 볼 수 없고, 실제 임금을 누구에게 지급할 것인가는 근로기준법상의 지급원칙을 별도로 고려해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Payroll 업무에서는 생각보다 이런 예외 요청이 자주 발생합니다.
“개인 사정 때문에 배우자 계좌로 급여를 보내주세요.”
“가족 계좌로 받고 싶습니다.”
“급여가 압류됐는데 어떻게 지급되나요?”
“지난달에 과지급된 금액을 이번 급여에서 빼주세요.”
처음에는 단순히 직원이 요청했으니 처리하면 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임금은 일반적인 거래대금과는 성격이 다릅니다.
그래서 Payroll에서는 ‘요청받았다’는 사실보다 어떤 근거로 지급방식을 변경할 수 있는가를 먼저 확인해야 합니다.
실무에서는 예외적인 급여 지급 요청이 들어왔을 때 최소한 다음 흐름으로 관리할 수 있습니다.
요청 사유 확인 → 본인 의사 확인 → 법적 기준 확인 → 내부 승인 → 증빙 보관 → 시스템 기록
여기서 중요한 것은 모든 예외를 막는 것이 아닙니다.
예외를 통제 가능한 프로세스 안으로 넣는 것입니다.
Payroll의 품질을 평가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급여일에 맞춰 돈을 보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급여 오류율
재이체 건수
소급급여 발생률
예외계좌 지급 건수
과오지급 건수
같은 데이터를 함께 봐야 실제 운영 품질을 알 수 있습니다.
저는 Payroll의 핵심을 세 가지로 보고 있습니다.
정확성, 적법성, 그리고 예외관리입니다.
HR에서는 문제가 발생하면 가장 먼저 규정을 찾아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취업규칙에는 어떻게 되어 있는지.
급여규정에는 어떻게 되어 있는지.
인사규정에는 어떻게 되어 있는지.
물론 중요합니다.
하지만 현장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보면 규정 자체가 없는 경우보다 규정과 실제 운영이 달라서 발생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예를 들어 이런 상황입니다.
성과급 기준은 존재합니다.
그런데 지급 시기가 매번 달라집니다.
평가제도는 있습니다.
그런데 결과 통보가 계속 늦어집니다.
인사발령 프로세스는 있습니다.
그런데 시행 직전에 직원에게 전달됩니다.
퇴직 프로세스가 있습니다.
그런데 부서마다 처리 방식이 다릅니다.
제도는 모두 존재합니다.
문제는 실행입니다.
민법에서 신의성실의 원칙을 다루면서 법령이나 계약뿐 아니라 여러 관계에서 발생하는 의무와 선행행위와 모순되는 행동에 대한 논의가 나옵니다.
이를 노동법적 판단과 동일하게 볼 수는 없지만, HR 운영을 바라보는 관점으로 가져오면 생각해볼 부분이 있습니다.
회사가 말한 기준과 실제 행동이 얼마나 일치하고 있는가.
결국 직원은 취업규칙만 경험하지 않습니다.
실제 회사가 어떻게 운영하는지를 경험합니다.
그래서 HR에서는 규범과 실제 실무를 함께 관리해야 합니다.
HR 데이터라고 하면 흔히 이런 지표를 먼저 생각합니다.
퇴사율.
채용 소요기간.
인건비.
인원 현황.
물론 모두 중요합니다.
하지만 HR 운영의 품질을 보려면 결과 데이터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저는 오히려 예외 데이터를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채용에서는Offer 수정률을 볼 수 있습니다.
공식 제안을 발송한 이후 연봉이나 직급을 얼마나 자주 수정하고 있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수정률이 높다면 채용담당자의 문제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내부 승인 프로세스 자체가 불안정한 것일 수 있습니다.
Payroll에서는 급여 재처리율을 볼 수 있습니다.
한 번 계산한 급여를 얼마나 자주 다시 계산하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특정 담당자의 실수보다 급여 마감 전에 필요한 데이터가 늦게 들어오는 구조가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인사운영에서는사후 승인율도 볼 수 있습니다.
원래 승인을 받은 후 처리해야 하는 업무가 얼마나 자주 먼저 실행되고 나중에 결재되는지 확인하는 것입니다.
이런 데이터가 쌓이면 질문이 달라집니다.
“누가 실수했지?”
가 아니라,
“어떤 프로세스가 반복적으로 실수를 만들고 있지?”
라고 질문할 수 있습니다.
오프피스트에서도 최근 HR Analytics 관련 콘텐츠에서 채용·유지·보상뿐 아니라 HR 운영효율성과 데이터 품질까지 연결해 지표를 바라보는 접근을 다루고 있습니다. HR 데이터는 숫자를 쌓는 것보다 의사결정과 운영 개선으로 연결될 때 의미가 있습니다.
이번 강의를 들으면서 HR 업무를 하나의 흐름으로 정리해보게 됐습니다.
회사의 기준이 무엇인지 명확해야 합니다.
누가 어디까지 결정할 수 있는지 정해야 합니다.
직원과 후보자에게 동일한 기준으로 설명해야 합니다.
약속한 내용이 실제 운영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돼야 합니다.
예외와 오류를 데이터로 남겨 다음 제도 개선에 활용해야 합니다.
저는 이 다섯 가지 중 하나라도 끊어지면 HR 운영에서 문제가 발생한다고 생각합니다.
규정은 있지만 권한이 불분명할 수 있습니다.
권한은 명확하지만 담당자마다 설명이 다를 수 있습니다.
설명은 잘했지만 실행이 늦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발생했지만 기록하지 않아 같은 문제가 반복될 수도 있습니다.
결국 HR의 역할은 제도를 만드는 것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제도가 실제 현장에서 같은 방식으로 작동하도록 연결하는 것까지가 HR의 역할입니다.
민법을 공부했다고 해서 민법의 법리를 근로관계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근로관계에서는 근로기준법을 비롯한 노동관계법령과 회사 규정, 실제 사실관계를 함께 확인해야 합니다.
다만 민법을 공부하면서 얻을 수 있었던 것은 하나였습니다.
문제를 바라보는 질문의 방식입니다.
누가 약속했는가.
그 사람에게 권한이 있었는가.
상대방은 무엇을 신뢰했는가.
의무는 언제 발생했는가.
실제로 약속이 이행됐는가.
이 질문을 HR 업무에 대입해보면 생각보다 많은 운영 문제가 보입니다.
좋은 HR 제도란 가장 많은 규정을 가지고 있는 제도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말한 것과 실제 실행되는 것이 가장 일치하는 제도.
저는 그것이 좋은 HR 운영에 조금 더 가까운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의 회사에서는 어떠신가요?
문서에 적혀 있는 HR 기준과 직원이 실제로 경험하고 있는 HR 기준은 얼마나 일치하고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