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지부 학생들을 초청해 진행한 특강에서 참석자들이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jpg)
-AI가 아이디어를 쏟아낼수록, 무엇을 만들지 않을지 가려내는 안목이 중요해진다
사내 봉사활동 기획안을 짜본 적 있나요? 회의실에 모여 화이트보드 앞에서 두 시간 동안 아이디어를 짜내다 결국 작년과 비슷한 안으로 돌아갔던 경험, CSR팀이든 그 캠페인의 사내 확산을 떠맡은 조직문화팀이든 한 번쯤 겪었을 겁니다.
요즘은 다릅니다. 생성형 AI에게 몇 문장만 던지면 캠페인 콘셉트, 포스터 시안, 참여 유도 문구까지 몇 분 안에 쏟아져 나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이디어가 이렇게 쏟아지는 지금도 진짜 직원들이 공감하는 사회공헌 프로그램은 여전히 드뭅니다. 왜일까요?

아이디어와 결과물 사이, 거리가 좁아졌습니다
생성형 AI는 일하는 방식 자체를 바꿉니다. 예전엔 사내 캠페인 하나 기획하려면 담당자의 경험과 몇 주의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지금은 초안이 순식간에 여러 개 쌓입니다. 문제는 여기부터입니다. 초안이 많아졌다고 좋은 기획이 저절로 나오는 건 아니거든요.
생성형 AI가 만든 가장 실질적인 변화는 시제품 제작의 문턱을 낮췄다는 겁니다. 예전엔 사내 캠페인 하나의 목업(포스터, 랜딩페이지, 홍보 영상 초안)을 만들려면 디자인팀 협조와 예산 품의가 필요했습니다. 지금은 담당자 혼자서 몇 시간 안에 그럴듯한 형태를 갖춘 결과물을 만들 수 있게 됐습니다.
이건 특히 별도 CSR 전담부서가 없는 조직, 혹은 있어도 HR·조직문화팀과의 협업 체제로 캠페인을 굴리는 조직에 의미가 큽니다. 사회공헌은 원래 CSR팀의 일이지만, 현실에서는 전담부서 없이 여러 팀이 나눠 맡거나, CSR팀이 기획한 캠페인의 사내 확산과 참여 유도를 HR·조직문화팀이 떠안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좋은 아이디어가 있어도 그걸 눈에 보이는 형태로 만들 리소스가 없어 포기했던 경험, 이런 구조에서 일해봤다면 낯설지 않을 겁니다. 그 좌절의 지점이 상당 부분 사라졌습니다.
다만 착각하면 안 되는 지점이 있습니다. 시제품을 빨리 만들 수 있게 된 것과, 그 시제품이 실제로 직원 참여로 이어지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아이디어를 내는 단계와 그걸 다듬어 현장에 안착시키는 단계는 여전히 분리돼 있습니다. 이 간극을 메우는 건 결국 담당자의 역량입니다.
목소리 없던 직원들에게 돌아간 표현의 도구
생성형 AI가 바꾼 또 하나는, 그동안 회사 안에서 자기 이야기를 표현할 기회가 없었던 구성원들에게 도구를 쥐여줬다는 점입니다. 기술 시연이 아니라 참여의 문제죠. 장애가 있거나, 글이나 디자인에 자신 없던 직원도 생성형 AI를 매개로 자신의 경험을 하나의 결과물로 만들어낼 수 있게 됐습니다.
여기서 새겨야 할 메시지가 있습니다. '생성형 AI를 쓴 사내 캠페인'이 꼭 기술을 전면에 내세울 필요는 없다는 겁니다. 오히려 기술이 배경으로 물러나고, 평소 목소리를 못 내던 구성원의 이야기가 앞에 설 때 캠페인은 진정성을 얻습니다. 기술을 보여주려는 캠페인과, 사람을 드러내려고 기술을 쓰는 캠페인은 결과물이 비슷해 보여도 전혀 다른 사회공헌입니다.
아이디어가 넘칠수록 피곤해지는 이유
문제는 여기서 시작됩니다. 생성형 AI가 아이디어를 쉽게 만들어낼수록, 역설적으로 '어떤 아이디어가 진짜 실행할 가치가 있는가'를 가려내는 능력이 더 중요해집니다. 브레인스토밍에서 수십 개 아이디어가 쏟아지는 건 더 이상 특별한 일이 아니죠. 그중 실행 가능하고 임팩트 큰 것을 골라내는 우선순위 설정 능력이 없으면, 생성형 AI는 그냥 아이디어의 홍수만 만듭니다.
이게 이른바 혁신 피로입니다. 만들어내는 속도는 빨라졌는데, 그걸 판단하고 책임지는 조직의 의사결정 구조는 그 속도를 못 따라갑니다. 결과적으로 선택지가 많아질수록 담당자는 오히려 더 지칩니다. 도구가 좋아졌다고 조직의 생산성이 저절로 따라오지 않는다는, 익숙하지만 자주 잊히는 원칙이 여기서도 그대로 작동하는 겁니다.
결국 남는 건, 무엇을 하지 않을 것인가입니다
AI가 던진 초안을 그대로 쓸 것인가, 아니면 우리 조직의 맥락과 구성원들의 실제 정서를 담아 다시 다듬을 것인가. 이 마지막 손길이 있어야 캠페인은 비로소 우리 팀 이야기가 됩니다. 생성형 AI가 만든 초안은 어디까지나 재료입니다. 그 재료를 조직의 맥락에 맞게 재구성하는 일은, 지금도 앞으로도 담당자의 몫입니다.
생성형 AI가 던지는 진짜 질문은 "무엇을 더 만들 수 있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만들지 않을 것인가"입니다. 만들 수 있는 게 많아진 시대일수록, 만들지 않을 것을 가려내는 안목이 담당자의 진짜 역량이 됩니다.
불씨는 도구가 만들어줄 수 있어도, 그 불을 어디에 놓을지 정하는 건 결국 사람입니다. AI가 아무리 많은 불씨를 흩뿌려도, 그걸 하나의 온기로 모아 동료의 마음에 가닿게 하는 일은 여전히 담당자의 손끝에서 이루어집니다.
결국 캠페인 하나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순간은, 화면 속 초안이 아니라 그 초안을 지우고 다시 쓴 담당자의 밤에서 태어납니다. 도구는 빨라졌지만, 진심이 도착하는 속도는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입니다.
김민석 <일하는 사람을 위한 ESG적 생각> 저자 / listen-listen@nat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