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4월, 아스날과 레알 마드리드의 챔피언스리그 경기 후반 13분. 데클런 라이스에게 프리킥 기회가 왔다. 아스널의 세트피스 코치 니콜라 조베르는 라이스에게 ‘뒷공간으로 공을 올리라는 신호’를 보냈다. 골대로 직접 차지말고, 준비해 둔 세트피스를 실행하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라이스는 다른 선택을 했다. 수비벽과 골키퍼의 위치를 보고 골대로 직접 찼다. 공은 벽 바깥으로 휘어 골문 안으로 들어갔다. 라이스는 인터뷰에서, 코치가 크로스를 올리라고 주문했지만 그 순간 직접 골대로 차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아르테타 감독도 “선수에게 선택지를 보여주고 상황을 그려주는 것은 코치진의 일이지만, 결국 경기장 안에서는 선수가 결정해야 한다”며 이 장면을 평가했다.
이를 ‘코치의 지시에 따르기보다 본인의 판단과 직감을 믿어 득점에 성공한 선수’의 이야기로만 읽어서는 안된다. 골이 들어갔기에 멋진 장면이 됐지만, 슈팅이 빗나갔다면 평가는 전혀 달랐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라이스가 코치의 지시를 무시했다는 사실이 아니다. 그는 코치의 지시를 하나의 중요한 정보로 받아들이고, 자신이 경기 안에서 읽은 정보와 비교한 뒤 선택했다.

학생선수 시절에는 이런 판단의 무게가 상대적으로 작다. 감독과 코치가 훈련을 설계하고, 선발의 기준을 제시하며, 경기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려준다. 선수는 그 안에서 자신의 역할을 익힌다. 지도자의 기대를 잘 읽고, 요구받은 움직임을 정확하게 해내는 것이 성장의 중요한 일부다.
하지만 프로가 되고, 특히 팀의 중심이 될수록 선수는 다른 종류의 역할을 맡게 된다. 감독의 전술이 있어도 경기장 안의 모든 상황을 대신 읽어줄 수는 없다. 상대가 예상과 다른 수비를 들고 나왔을 때 어떤 선택을 할지, 지금 필요한 것이 속도를 높이는 일인지 흐름을 끊는 일인지 판단해야 한다. 시니어 선수는 주어진 역할을 잘 수행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팀에 없는 역할을 발견해 해결해야 하는 선수가 되어야 한다.
직장도 크게 다르지 않다. 처음 일을 배울 때는 상사의 기대를 읽는 일이 중요하다. 어떤 수준의 자료를 원하는지, 보고는 언제 하는지, 이 팀이 중요하게 보는 기준은 무엇인지, 우리 팀의 성과에 영향을 미치는 사람들은 누구인지 파악해야 한다. 이를 두고 단순히 눈치가 늘었다거나 정치를 잘한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내 일이 어떤 흐름 안에서 진행되는지 배우는 과정에 가깝다. 문제는 이런 파악들이 어느 순간 내 일의 목적을 완전히 대신하기 시작할 때다.

서비스 기획자가 고객 이탈을 줄이는 프로젝트를 맡았다. 상사는 시장 규모와 경쟁사 기능을 정리한 보고서를 먼저 원한다. 기획자가 사용자 인터뷰를 해보니 이탈의 이유는 거창한 시장 변화가 아니라 ‘가입 과정의 절차’에 있었다. 인증 절차가 너무 복잡해 사용자가 중간에 포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 기획자는 두 가지 선택을 할 수 있다. 1) 상사가 원하는 보고서를 완성도 높게 만들거나, 2) 혹은 당장 가입 과정을 고쳐볼 작은 테스트를 제안할 수 있다. 첫 번째 선택은 평가자인 상사의 기대를 충족하기 쉽겠지만, 두 번째 선택은 고객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더 가까울 수 있다. 무엇이 먼저여야 할까.
시니어가 된다는 것은 단순히 나이나 연차가 늘었다는 뜻이 아닐 것이다. 상사의 요청을 그대로 수행하기 전에, 그 요청이 궁극적으로 해결하려는 고객의 문제와 연결되는지 한 번 더 묻는 사람이 되는 일에 가깝다. “이 보고서가 필요한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지금 고객에게 가장 큰 문제는 이것인데, 먼저 확인해봐도 될까요?” 이런 질문들은 상사의 지시에 의문을 제기하거나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일의 최종 목적지를 평가자의 기대에 두는 것이 아닌, 고객의 문제해결과 고객의 만족에 두는 것이다.
경력이 쌓일수록 내 판단과 상사의 판단이 다른 순간이 많아진다. 이때 우리는 흔히 둘 중 하나를 택한다. 상사의 반대가 두려워 자신의 생각을 거두거나, 반대로 상사의 반대를 ‘현장을 모르는 사람의 간섭’으로 치부한다.
기존 고객을 맡은 영업 리더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상사는 이번 분기 목표를 맞추기 위해 추가 상품 제안을 늘리라고 한다. 숫자로 보면 당연한 요청이다. 그러나 현장에서 만난 고객들은 지금 새 상품보다 기존 서비스의 장애 대응과 운영 지원에 더 큰 불만을 갖고 있다. 이 상태에서 추가 제안을 밀어붙이면 이번 분기 매출은 일부 만들 수 있다. 대신 고객은 ‘기존 서비스도 제대로 운영되지 않는데 또 팔려고 한다’고 느낄 수 있다.
여기서 필요한 것은 “그건 안 됩니다”라는 반발이 아닌, 상사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아내는 일이다. 정말 이번 분기 매출이 문제인지, 투자한 자원을 회수해야 하는 상황인지, 특정 사업의 우선순위가 걸려 있는지 묻는 것이다. 그리고 그 답을 들은 뒤 고객 유지율, 재계약 가능성, 운영 이슈의 규모 같은 근거를 가져와 다른 선택지를 제시하는 것이다.

독립성은 반대를 듣지 않는 태도가 아니다. 상대의 우려와 조직의 맥락을 판단 안에 포함하되, 최종 판단을 누군가에게 넘기지 않는 태도라고 볼 수 있다. 라이스 역시 코치의 지시, 동료의 조언, 수비벽과 골키퍼의 위치를 모두 고려했을 것이다. 그 정보들 사이에서 무엇을 우선할지 결정한 것이 그의 역할이었다.
프리랜서가 되면 이 질문은 더 직접적이다. 조직 안에 있을 때는 상사가 일의 우선순위를 정해주고, 승인 과정이 다음 행동을 결정해준다. 그 구조가 답답해도 기준은 있다. 하지만 조직 밖에서는 누군가가 내 역할을 정해주지 않는다.
브랜드 리뉴얼을 맡은 디자이너가 있다고 해보자. 담당자는 빠르게 볼 수 있는 로고 시안을 원한다. 그런데 사전 미팅과 고객 반응을 살펴보니 문제는 로고의 모양이 아니다. 회사가 누구를 위해 어떤 가치를 만드는지, 웹사이트와 영업 자료, 고객 응대에서 서로 다른 말을 하고 있다. 요청받은 시안을 빠르게 만드는 편이 관계상 안전할 수 있다.
하지만 디자이너가 이 문제를 발견했다면, 시안에 앞서 브랜드 메시지와 고객 접점을 함께 정리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제안할 수 있다. 그 제안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수도 있고, 그만큼 일이 늘어나거나 계약 범위를 다시 조정해야 할 수도 있다. 그래도 그 디자이너가 자신의 고객을 ‘담당자’가 아니라 ‘이 브랜드를 만나게 될 사람들’까지 포함해 본다면, 더 나은 결과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달라진다.
직장인에게도 같은 일이 생긴다. 내 고객은 상사 한 명이 아닐 수 있다. 내가 만든 교육을 실제로 듣는 구성원, 그 구성원을 교육에 참석하도록 허락한 상위 리더, 내가 만든 정책을 적용하는 현장 관리자, 내가 만든 제품을 쓰는 사용자, 내가 넘긴 결과물을 이어받아 일해야 하는 동료가 고객일 수 있다. 이들을 보지 않은 채 나의 평가자만 만족시키는 일을 오래 하면, 우리는 점점 ‘일을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형식적인 일을 하는 사람’이 된다.
상사의 요청은 중요하다. 다만 그 요청이 곧 고객의 문제 전부는 아니다. 일을 시작할 때 한 번 더 물어볼 필요가 있다. 지금 이 결과물을 보는 사람은 누구인지, 그 사람은 무엇 때문에 불편하거나 망설이는지, 내가 하려는 일이 그것을 실제로 바꾸는지. 평가자의 기대를 읽는 데 익숙한 사람일수록 이 질문을 던지는게 낯설고 버거울 수 있다. 하지만 역할 전환은 ‘무엇을 시켰는가’보다 ‘무슨 문제를 풀고 있는가’로 일의 중심을 옮기는 데서 시작된다.
내 제안이 반대에 부딪혔을 때 곧바로 물러날 필요도, 맞서 싸울 필요도 없다. 먼저 상대가 걱정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확인해보는 태도가 필요하다. 비용인지, 일정인지, 실패했을 때의 리스크인지, 혹은 아직 공유되지 않은 조직의 우선순위인지 묻는 것이다. 우려를 정확히 알면 내 판단을 수정할 수도 있고, 더 단단한 근거를 갖고 설득할 수도 있다. 독립적인 판단은 내 의견을 끝까지 관철하는 능력이 아니라, 더 많은 정보를 받아들인 뒤에도 책임 있게 선택하는 능력이다.
지금 맡은 일 가운데 하나를 골라, 내 판단으로 문제를 정의하고 선택의 이유를 설명하고 결과를 끝까지 확인해보자. 잘됐다면 왜 잘됐는지 남기고, 기대와 달랐다면 무엇을 바꿔야 하는지 돌아보는 것이다. 이런 경험이 쌓일수록 누군가의 승인에 기대지 않고도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이 생긴다. 물론 ‘고객을 위해서’라는 말이 내 판단을 절대화해주지는 않는다. 때로는 충분한 근거 없이 기존의 합의나 권한을 건너뛰는 명분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자기 역할을 만들어가는 사람에게는 선택의 근거를 설명하는 일, 결과를 확인할 기준을 세우는 일, 기대와 다른 결과가 나왔을 때 수정하는 일이 함께 필요하다.
라이스의 슈팅은 무모한 즉흥이 아니었다. 그는 골키퍼와 수비벽의 위치를 봤고, 평소 그 궤적의 킥을 연습해왔다고 설명했다. 경기장 위의 판단은 순간적이었지만, 그 순간을 가능하게 한 것은 준비와 관찰이었다. 시니어의 독립성도 마찬가지다. 독립적으로 일한다는 것은 혼자 결정하고, 다른 사람의 의견을 밀어내는 일이 아니다. 상사와 동료, 고객이 보내는 서로 다른 신호를 듣고, 그중 무엇을 우선해야 할지 판단하는 일이다.
상사의 인정을 받는 데 익숙했던 사람에게 이 전환은 쉽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의 기대를 충족하는 일은 기준이 분명해서 안전하다. 반면 고객의 문제를 먼저 보겠다는 선택은 때로 상사의 요청과 다른 순서를 제안해야 하고, 아직 증명되지 않은 결과를 책임져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평가자의 기대를 버려야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것을 최종 목적지에 두지 않는 것이다. 상사의 요청은 판단에 필요한 중요한 정보일 수 있지만, 내 일의 의미를 결정하는 유일한 기준은 아닐 수 있다.
나는 지금 누구의 기대를 충족하기 위해 일하고 있는가. 그리고 그 기대는 내가 책임져야 할 고객의 결과와 정말 같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는가. 시니어가 된다는 것은 그 질문을 피하지 않고, 자신의 답을 만들어가는 일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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