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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의 변역리더십 (연재 1화)

세종의 변역리더십 (연재 1화)

변역에는 “내가 먼저 바뀌고 남이 변하기를 기다린다”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세종은 변역하는 리더십의 최강자였다.
조직문화리더임원CEO
경묵
김경묵Dec 8, 2025
20526

세종의 변역리더십을 연재합니다

세종은 변역하는 리더십의 최강자였다. 그의 변역리더십이 빛을 발한 때가 있었다. 1432년부너 1438년까지 7년여 동안 여진족과의 혼란했던 상황을 마무리 지은 과정이 그러하다. 세종실록에는 이때의 상황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 연재는 그 하나하나의 기록들을 연결해서 쓴 <이도 다이어리>에서 발췌 했다. 필자는 이 책의 저자이다. 자고 나면 새로운 기술적 개념이 등장하고, 우리를 혼란한 상황으로 빠뜨리고 변화를 강요하는 지금, 혼란한 상황 속에서 전략을 짜고 실행하고 결과를 만든, 세종 이도의 변역하는 지혜를 한 가지 해결 방안으로 제시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때 그의 나이가 36살이었다.

연재 1화 혼란이 가득한 긴급상황, “모두의 생각을 모아야 한다”

연재 2화 힘의 균형이 깨진상황, “적과의 동침도 해야 한다”

연재 3화 고비를 넘기시기, “전쟁의 끝이 보인다”

연재 4화 바람처럼 사라진혼란, “비로소 보여진 새벽의 평온” 그리고 연재 총정리

 

1432년(36살), 평화가 깨지는 순간

 

책상머리 지식으로 일하는 관리들

그동안 조선에 큰 전쟁이 없고 평안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은 전적으로, 여진족들이 하경복 이징옥 등 용맹한 장수들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14년째 조선의 왕인 내가 한 일은 그다지 없는 것 같다. 그런데, 요즈음 평안도 압록강 너머에 사는 여진족의 움직임이 수상하다. 그래서 2월 10일에 급한 대로, 적이 쳐들어 왔을 때 연기를 피워서 알리는 연대를 높이 쌓고, 미리미리 무기를 정비하고 식량을 쌓아 두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여진족이 자주 출몰하는 평안도 의주를 다스리는 수령을 이사검으로 교체했다. 이사검은 국경 지역의 특성을 제대로 이해하고 통솔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적임자다. 변방 수령으로 있다가 잠시 쉬고 있는 그를, 급히 또 국경으로 보낼 수 밖에 없어 미안한 마음이지만 어쩔 수 없다. 동시에, 또 다른 국경인 함길도의 방어 상태를 확인하고 대안을 마련하기 위해서 3월 6일에 국무총리(영의정) 황희와 재무부장관(호조판서) 안순을 함경도 길주와 경원에 출장 보냈다.

그랬더니, 왕의 정책을 비판하는 일을 하는 김중곤과 김숙검이 찾아왔다. 황해도는 몇 해 동안 물난리가 났고 이제 농사일이 많아질 때인데, 성을 쌓으면 농사를 망치게 되고, 사신 접대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고 말한다. 책상 앞에서 익힌 원론적인 지식을 늘어놓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두 사람에게 지금 당장 함길도 길주성으로 여진족이 쳐들어오면 어떻게 방어할 지와 성을 쌓기 적합한 때가 언제인지를 물었다. 자기들은 그런 것은 모르고 다만 백성의 노고가 커지는 것이 염려돼서 말했을 뿐이라고 대답한다.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잠시 아무 말없이 낮은 천정을 바라보다가 호흡을 가다듬고 조용히 타일러서 돌려보냈다.

4월 12일, 황희의 출장 보고서는 역시나 수준이 다르다. 보고서를 읽고 있으면, 현장을 걷고 있는 느낌이 든다. 보고 들은 것으로 끝나지 않고 적절한 대안을 제시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있다. 여기에 더해서 고려 때, 백두산 부근의 우리 땅을 명나라가 가져간 것으로 의심되는 땅이 있는데 언젠가는 되찾아야 한다고 까지 언급하고 있다. 나는 이 땅의 존재를 지리지 책에서 보았는데, 황희는 직접 확인하고 왔다. 황희는 내가 궁금한 것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알고 있다. 그런데, 황희가 몇일 뒤에 사직서를 제출했다. 깜짝 놀라서 가까이 불러서 “당신이 떠나면 내가 의지할 사람은 누구인가?”라고 물으며 붙잡았다. 그는 한동안 직무에 충실했다가, 8개월 후에 또 사직서를 제출했다. 바로 돌려보냈지만, 그의 나이가 70살이다.

 

14년 만의 첫 혼란

12월 9일, 내가 그토록 우려했던 일이 벌어 지고야 말았다. 한밤 중에 말을 탄 4백여명의 여진족이 평안도 여연 지역을 기습적으로 침입해서, 집을 불태우고 재산을 약탈하고 사람을 죽이고 납치해 갔다는 긴급 보고를 받았다. 관리가 책상 앞에만 있고, 현장을 등한히 했을 때, 평화는 이미 깨져 있었다. 적이 쳐들어 온 것은 그 상태를 눈으로 확인시켜 준 것이다. 이번에 쳐들어온 여진족 무리는 압록강 지류인 파저강 인근에 모여 사는 올량합 무리로 추정된다. 평안도 여연은 올량합이 사는 방향으로 봉곳이 솟아 있어서 올량합이 공격하기 용이한 곳이다. 여진족은 조선의 황해도·평안도·함길도의 국경지역부터 만주 지역에 이르는 넓은 지역에 흩어져 사는 여러 무리를 통칭해서 부르는 말이다. 조선은 여진족(女眞族)을 크게 4개 이름으로 구분한다.

①올량합(兀良哈 오랑캐 또는 건주여진으로도 부름), 평안도 압록강 국경너머 강가에 거주,

②우디캐(兀狄哈 올적합 또는 야인여진으로도 부름), 함길도 두만강 국경너머 산악지대에 거주,

③홀라온(忽剌溫 해서여진으로도 부름), 조선과 먼 만주지역 등지에 거주,

④오도리(斡朶里 알타리로도 부름), 1410년 이후 함길도 회령 등지에 거주하고있다.

이들은 농사를 짓기도 하지만, 대체로 약탈과 납치를 일삼으며 주거지를 옮겨 다니며 살고있다. 그리고 같은 이름의 무리 안에서도 사는 지역과 우두머리(지휘)의 성향에 따라 여러 갈래로 갈라진다. 이처럼 여진족은 다양하고 복잡해서 서울에 있는 내가 상황을 속속들이 아는 것이 불가능하기에, 현장을 통솔하는 장수와 관리의 의견을 최대한 따르며 의사결정하고 있다.

올량합 무리는 그동안 명나라 사람과 조선인을 납치해서 노예와 첩으로 부리며 살아 왔다. 몇 년 전부터 그들의 노비와 첩이 압록강을 건너 조선 땅으로 탈출하면, 돌려주지 않았다. 올량합의 분노가 계속 누적되고 있었다. 그동안 조선으로 탈출한 사람을 파악해 보니, 무려 육백 명이나 되었다. 여기에 더해서, 지난해에 명나라 사신 장동아가 군사 400명을 이끌고 올량합 무리에게 찾아가서, 납치된 많은 수의 명나라 사람과 조선인을 한꺼번에 풀어주는 일이 있었다. 그동안 명나라 황제는 여진족이 사람을 납치해서 노비로 부리는 사실을 알고도 눈감아 주었는데, 변화가 생겼던 것이다. 그 결과, 부족해진 노비를 조선사람으로 채우려고 쳐들어온 것이다.

이 사건으로 조선과 여진족은 생존을 위한 전쟁을 피할 수 없는 상황으로 바뀌었다. 당장이라도 올량합을 몰살시킬 군대를 보내고 싶은 심정이다. 그러나 명나라 땅에 군대를 들여보내는 것은 황제와 사전 협의가 필요한 중대한 사안이었다. 몇일 동안 밤을 세워가며 대책회의를 거듭하고 있다. 12월 21일, 황제에게 조선의 피해 상황을 알릴 문서를 작성하는 회의를 마치니 어느새 새벽 3시가 되었다.

하루는 한 올량합 무리의 추장인 이만주의 부하가 여연군 수령에게 찾아왔다. 자신이 우디캐(兀狄哈) 무리와 싸워서 조선인 포로 64명을 빼앗았고, 안전하게 보호하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수상하다. 정황상, 평안도를 공격한 여진족은 올량합 무리가 분명한데, 올량합 무리의 추장 이만주가 우디캐의 짓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만주의 잔꾀일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 한시도 경계를 게을리하지 말도록 지시했다. 이만주는 명나라 정부의 관직을 가지고 있으면서, 동시에 우리에게서 식량과 생필품을 구해가는 등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올량합 추장 중에 한명이다. 그런 그가 국경을 넘어 우리 백성을 약탈한 것이 사실일까?

 

 

 

1433년(37살), 긴급한 때일수록 모두가 말하는 회의

 

모두가 말하는 회의, 다사리

지난해 12월에 여진족 올량합 무리가 평안도 국경을 침입했을 때, 바로 군사를 일으켜 응징하지 않았더니, 국경선을 제집처럼 넘나들고 있다. 이러한 행태를 더 이상 내버려 두어서도 안되고, 납치된 백성을 데려와야 한다. 1433년(세종 15년) 1월 11일, 국경 방어 최고책임자를 최윤덕 장군으로 교체했다. 최윤덕은 임명장을 받자마자 나에게 군사의 훈련 상태를 점검해 달라고 요청했고, 나는 곧바로 전국의 수령에게 공문을 발송했다. 모든 신하가 한 목소리로 적을 무찌를 적임자로 최윤덕을 꼽은 이유가 바로 이런 점이다. 상황이 이런데도 인사 최고책임자인 허조는 국경의 성벽을 튼튼히 쌓고 방어에 전념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허조의 말을 듣고 있으니 1419년에 대마도 왜적이 조선에 쳐들어 왔을 때, “바다의 군함을 없애고 육지에서 방어하는 체제로 전환해야 한다”고 말하던 순진했던 내 모습이 떠오른다. 당시 부왕 태종의 신속한 판단으로 대마도를 정벌하고 왜적에게 두려움을 심어 놓았기에, 지금까지 왜적의 출몰이 잠잠하다. 지금 올량합을 섬멸해야 하는 이유다.

다음날, 평안도와 함경도를 다스리는 관찰사를 이숙치와 조말생으로 전격 교체했다. 그리고 모든 신하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최윤덕을 가까이 불러서 “군사를 움직이는 모든 판단은 경의 결정에 따르겠다”는 말로 현장에서 신속한 군사작전이 가능한 의사결정 체계를 갖추었다. 이중에 조말생은 비리를 저질러서 근신 중에 있었지만, 태종 때 풍부한 경험을 쌓은 적임자 이기에 주저하지 않고 선임했다. 2월 10일에는 박호문을 적들이 사는 곳으로 들여 보내 정탐을 하도록 했다. 그리고 2월 15일 이른 새벽에 고위급 신하를 모두 불러서 올량합 토벌을 위한 비밀 작전회의를 했다. 영의정 황희를 시작으로 한사람도 빠짐없이 의견을 빠짐없이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방식으로 진행했다.

여진족과 전투 경험이 있는 하경복은 당장 토벌하지 않으면 적들은 반드시 다시 쳐들어 올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반면에, 지금은 때가 아니니 1~2년 동안 준비한 후에 토벌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도 있다. 압록강이 얼은 겨울이 적기라는 의견과 수풀이 우거진 여름이 타당하다는 의견도 있다. 들어보니 저마다 생각은 달랐지만, 우리가 조심해야하는 이유와 준비해야 하는 것들이 조목조목 담겨있었다. 당장 토벌해야 한다고 말하는 신하는 북방 국경지역 근무경험이 있는 신하였다.

비록 하루 동안의 회의였지만 모두가 한자리에 모여서 마음 속에 담아둔 생각을 털어 놓으니, 회의를 마칠 즈음에 몇가지 사항에는 서로 공감을 이루었다. ①적은 먼 곳에 있는데 지금은 추운 겨울이고, ②국경 너머 땅은 길이 좁고 꼬불꼬불해서 경계하며 행군해야 하고, ③숲이 울창할 때 기습공격을 받으면 속절없이 당할 수밖에 없기에 조심해야 하고, ④서울에 여러 여진족이 거주하고 있으니 비밀리에 공격계획을 짜야 한다는 것이었다. 비로소 적을 토벌해야하는 이유가 선명해졌고, 공격 시기는 왕의 몫이 되었다. 오늘 회의를 사관이 빠짐없이 기록했으니, 훗날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은 오늘의 대응 방안을 참조할 수 있을 것이다.

2월 21일, 군사작전과 직접 관계되는 최소한의 신하만 따로 불러서 ①군대 규모와 말·활·화살·갑옷·투구·창·칼·화포 등 병장기는 얼마나 필요한지, ②압록강을 건널 때 배와 부교 중에 어느 것을 사용할지, ③병사들은 어떤 방식으로 모을 것인지, ④군대의 행군과 전투의 진법은 어느 것을 택할지, ⑤군대편성은 어떻게 할지, 등에 대한 세부사항을 협의하고 나서, 황희 맹사성 권진 삼정승(국무총리, 부총리)에게만 비밀장소에 모여서 세부 작전계획을 세우도록 지시했다. 풀이 길어지고 무성해지는 4월에 토벌하기로 정했고, 압록강을 건너는 방법은 부교로 결정했다. 부교는 칡·갈대·나무로 만드는 임시 다리인데, 강가 근처에 칡과 갈대 자라는 곳을 찾고 울타리를 만드는 것처럼 위장해서 나무를 쌓아 두었다가, 신속하게 만들기로 했다. 박호문이 적이 거주하는 압록강 지류인 파저강까지 깊숙이 들어가서 염탐하고 18일만에 무사히 돌아왔다. 올량합은 우리의 공격을 직감하고 일부는 산속으로 숨었다고 한다. 적을 안심시켜서 산속에서 나오게 할 특별한 전략이 필요해졌다.

3월 7일, 산 속에 흩어져있는 적을 소탕할 때는 여러 방향에서 동시에 빠르게 공격해야 한다는 최윤덕 장군의 보고를 받고, 군사를 3천명에서 1만명을 늘렸다. 이후에 또 5천명을 추가해서 1만 5천명으로 확정했다. 군사들이 평안도 국경에 집결하고 있다. 3일 후에 토벌해야 할 적으로 올량합 추장 이만주와 그를 따르는 무리를 명시하는 문서를 작성했다. 이만주는 건주본위도지휘라는 중국의 관직을 가지고 있는 자다. 그래서 중국에 사신을 보내서 이만주를 공격할 사전허가를 받아 두었다. 모든 공격 준비는 끝났다. 그런데, 3월 17일에 인사 책임자 허조가 걱정 가득한 얼굴로 찾아왔다. 4월에 큰비가 내리면 강물이 불어나고 길이 질퍽해지고 초목이 무성해져서 산과 골짜기의 길이 덮이니, 강이 어는 겨울이 타당하다고 공격을 만류했다. 이 말에 “지금은 중국 황제가 우리 군대가 중국 땅에 들어가는 것을 용납해 주고 있지만 훗날 정세가 변하면 거부할 수도 있다.”는 말로 걱정이 많은 허조를 달래서 돌려 보냈다. 허조는 인사업무를 오래한 신하다.

 

비로소 해결된 근심의 절반, 평안도

3월 19일, 종묘와 사직에 제사 지내는 것으로 공격 명령을 내렸다. 이후로 나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왕비들과 함께 충청도 아산으로 온천여행을 떠났다. 낮에는 매사냥을 하고 밤마다 잔치를 열면서 느긋하게 이동했다. 온천에 도착해서는 수시로 주변 백성들과 어울리며 잔치를 벌였다. 이만한 연출이면 압록강 너머까지 소문이 전해지고 적을 안심시키는 효과가 있으려나, 온천 물에 몸을 담그니, 그동안 아팠던 통증이 거짓말 같이 사라지는 효과를 본 것은 덤이다. 내가 온천에서 휴가를 보내는 동안에 우리 군대는 조용히 압록강을 건넜다. 적이 있는 파저강까지 행군하려면 20일 이상 걸릴 것이다.

4월 10일 평안도 강계에 집결한 군대가 출병할 때, 최윤덕은 전투 수칙을 재차 하달했다. 조선에 쳐들어 온 올량합은 마을을 불태우고, 여자와 노인까지 살해하고, 어린 아이를 눈 위에 던져서 얼어 죽게 하고, 약탈하고, 사람을 납치해 가는 등 야만적인 행동을 서슴지 않았다. 그렇지만, 우리는 ①늙고 어린 사람은 때리거나 찌르지 말고, ②항복하면 죽이지 말고, ③약탈하지 말고, ④소·말·닭·개 등 가축을 죽이지 말고, ⑤집을 불태우는 것을 금지하는 등의 전투 수칙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 이를 어길 시에는 군법으로 처벌할 것이라고 명령했다.

전장에서 소식이 없어서 마음을 졸이고 있었는데, 5월 5일에 승전고를 보내왔다. 지난 몇 달 동안 한시도 긴장을 늦추지 못했었는데, 비로소 마음이 놓인다. 이 소식을 들은 네 아들이 음식을 장만해 가지고 찾아와서 나를 즐겁게 해주었다. 며칠 후에는 동대문 밖에 나가서 매 사냥을 구경하며 크게 숨도 쉬고 왔다. 5월 25일, 최윤덕 장군이 서울로 돌아왔다. 그동안의 노고를 위로해 주려고 가까이 불러서 술자리를 가졌다. 하루는 강가에 주둔했는데, 노루 네 마리가 군영 안으로 들어와서 손쉽게 잡았다고 한다. 노루를 올량합에 비유하며, 이날 승전을 직감했다고 한다. 그리고는 여진족의 보복 공격을 대비하는 이야기를 나누는 일하는 자리로 바뀌었다.

다음날, 토벌에 참전한 장수들을 위로하는 연회를 성대하게 열었다. 그런데, 김효성 장군이 연회 중간에 도착했다. 급히 오느라 연회복을 준비하지 못했기에 즉시, 내 옷과 신발을 내어주었다. 김효성은 지금 왕의 옷을 입고 연회를 즐기고 있다. 이토록 기쁜 자리에 왕이 두 명이나 있어서 기쁨도 두배다. 참석자는 나보다 내 분신에게 먼저 술을 받아 마시려고 한데 섞여서 농담을 던지며 왁자지껄하다. 분위기가 무르익었기에 조용히 자리를 비켜 주었다. 그동안 나에게 하지 못한 말이 있었던 신하는 김효성과 왕의 뒷담화를 하며 속이 후련했을 것이다. 나 또한 나라의 큰 근심거리 하나를 덜어낸 날이다.

6월 2일, 토벌에서 사살하거나 생포한 올량합이 오백 여명이었는데, 이중에 포로 174명을 서울로 압송했다. 이들의 몰골을 보니, 여름인데도 털옷을 입고있어서 얇은 옷으로 갈아 입히고 경기도와 충청도의 각 고을에 분산해서 살게 했다. 해당 지역의 수령에게 이들을 정성껏 보살피고, 특히 여자들은 희롱 당하지 않도록 지켜주라고 당부했다. 윤8월 19일에 38명을 그들이 살던 땅으로 돌려 보냈고, 3일 후에는 49명을, 또 5일 후에는 62명을 추가로 돌려 보냈다. 그리고 7월 22일에 감옥에 가두어 두었던 군인 2명을 풀어주며 “조선이 올량합을 토벌한 것은 오로지 죄지은 자를 처벌할 목적이었을 뿐이다. 진심으로 항복하면, 남은 포로를 모두를 돌려 보내겠다”라는 말을 전하도록 했다. 토벌을 끝냈으니, 더 이상의 살상보다는 여진족에게 두려움을 심어주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평안도 국경을 안정화 했으니, 남은 절반인 함경도 국경선을 온전하게 회복해야 하는 때가 됐다. 특히 함경도 회령은 본래 우리 땅인데, 오래전에 여진족의 한 부류인 알타리들이 몰려 거주하고 있다. 다양하고 복잡한 문제로 얽혀있는 함경도 영토회복을 생각하면 잠이 안 오지만, 오늘 밤은 잠시 쉬어가기로 한다.

[2화로 이어집니다]


경묵
김경묵
창의성은 서사를 기능으로 바꿔내는 과정에서 드러난다
삼성전자에서 디자이너로 20년 근무했고, HBR(하버드 비즈니스 리뷰)에 논문을 게재한 유일한 한국 디자이너이다. 지금은 서사를 기능으로 바꿔내는 소프트한 창의성과 The AX Wave에 관한 글을 쓰고, 강의를 하며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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