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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의 변역리더십 (연재 2화)

세종의 변역리더십 (연재 2화)

변역에는 “내가 먼저 바뀌고 남이 변하기를 기다린다”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세종은 변역하는 리더십의 최강자였다.
조직문화리더임원CEO
경묵
김경묵Dec 10,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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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과 세상을 바꿔낸, 세종의 변역리더십을 연재합니다

세종은 변역하는 리더십의 최강자였다. 그의 변역리더십이 빛을 발한 때가 있었다. 1432년부너 1438년까지 7년여 동안 여진족과의 혼란했던 상황을 마무리 지은 과정이 그러하다. 세종실록에는 이때의 상황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 연재는 그 하나하나의 기록들을 연결해서 쓴 <이도 다이어리>에서 발췌 했다. 필자는 이 책의 저자이다. 자고 나면 새로운 기술적 개념이 등장하고, 우리를 혼란한 상황으로 빠뜨리고 변화를 강요하는 지금, 혼란한 상황 속에서 전략을 짜고 실행하고 결과를 만든, 세종 이도의 변역하는 지혜를 한 가지 해결 방안으로 제시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때 그의 나이가 36살이었다.

연재 1화 혼란이 가득한 긴급상황, “모두의 생각을 모아야 한다”

연재 2화 힘의 균형이 깨진상황, “적과의 동침도 해야 한다”

연재 3화 고비를 넘는시기, “전쟁의 끝이 보인다”

연재 4화 바람처럼 사라진혼란, “비로소 보여진 새벽의 평온” 그리고 연재 총 정리

1434년(38살), 토벌 이후 함경도로 쏠리는 힘의 균형

 

흩어지고 모이는 여진족

우리나라와 중국의 국경선은 백두산을 중심으로 서쪽은 평안도 압록강, 동쪽은 함경도 두만강을 물줄기로 길게 나뉜다. 강 건너편에 수많은 여진족 부족들이 거주한다. 오도리 부족은 우리 땅에 들어와 살고있다. 압록강 강변은 대체로 편평하고 두만강 부근은 산악지대가 많다. 여진족들 중에 조선 국경 인근에는 크게 두 부족이 거주하는데, 올량합 부족은 서쪽 압록강을 끼고 농사지으며 살고, 우디캐 부족은 동쪽 산악지대에서 사냥하며 산다. 그런데, 지난해 우리 군대가 토벌한 압록강 지류인 파저강 강변에 살던 올량합 무리가 동쪽 산악지대로 옮겨가거나 중국 만주 쪽으로 멀리 흩어졌다. 그 결과, 지금 서쪽 국경은 텅 비었고, 동쪽 국경은 북적인다. 함경도 두만강을 따라서 긴장감이 고조되고 있는 이유다. 2월 5일, 이 와중에 최윤덕 장군이 사직서를 제출했지만 반려했다. 최윤덕은 작년부터 서울과 평안도를 오가며 좌의정과 여진족 토벌 총책임자 역할을 겸임하느라 몸과 마음이 지쳐있는 상태인 것은 알지만, 지금은 그가 꼭 국경에 있어야 한다.

함경도 회령에 군대를 충원하고, 임시로 나무 울타리를 쳐서 방어를 위한 진(陣)을 구축했다. 그랬더니, 함경도 회령에 터를 잡고 살고있는 오도리 부족 추장이 찾아와서, 우리를 데리고 살 것인지 쫓아낼 것인지를 물었다. 회령은 땅이 비옥해서 농사가 잘되고, 가축을 기르기에 적합해서 떠나기 싫은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한 내 대답은 확고하다. “우리 백성으로 살고자 한다면 환영한다”라고 말했다.

국경에 조선 사람이 살아야 나라를 지킬 수 있다. 그런데, 함경도 국경지역은 오도리들이 비집고 들어와 터를 잡고 있기에 우리 백성이 적고 황량하다. 함경도 가장 북쪽인 경원과 영북에 군대를 충원 하려는데 지원자가 없다. 유일한 지원자는 험한 지역에서 오래 근무하면, 노비신분을 양민신분으로 신분을 격상시켜 주는 혜택을 받는 보충군에 속한 군인 뿐이다. 우선, 함경도 경성에 사는 백성을 국경과 맞닿은 경원으로 이주시키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평안도 국경지역은 농사짓는 백성이 있기에 마을이 있어서 다행이다.

지금 경원은 집 화장실 등 생활 기반시설이 너무나 열악하지만, 군량미를 보급하니 굶지는 않을 것이다. 군량미를 충당하느라, 가을부터 중앙정부관리의 급여를 삭감했고, 겨울부터는 궁궐의 아침밥을 줄였다. 작년과 올해 거듭해서 농사가 흉작인데다가, 평안도와 함경도는 전쟁을 대비해야 하기에 세금을 크게 줄였다. 부족한 세금을 메우기 위한 특단의 조치를 단행한 것이다. 지금은 군인이 먹을 밥상을 차리는 것이 최우선이다.

하루는 조선을 배신하고 조선의 적인 이만주와 어울려 다니며 조선을 협박하는 오도리 동범찰을 따르는 무리 토벌을 논의했다. 함경도지사(관찰사) 김종서는 반대하고 함경도 영북을 방어하고 있는 이징옥 장군은 당장 토벌해야 한다고 엇갈린 주장을 한다. 영의정 황희에게 물으니, 우리가 먼저 공격하면 오히려 여진족들이 똘똘 뭉쳐서 공격해 오는 빌미를 제공할 것이라며 반대한다. 두 의견 모두 틀린 말이 아니기에, 충분히 의견을 나누며 결정을 미루고 있다. 5월 29일에 이르러, 최윤덕 장군이 지금은 ①성을 돌로 견고하게 쌓고, ②올량합을 토벌한 서쪽 압록강 건너 땅에 우리와 우호적인 여진족 세력이 이주하게 유도하는 전략을 짜는 것이 절실하다고 말한다. 평안도 함경도를 통틀어서 국경에 돌로 쌓은 안전한 성이 없는 것이 현실이다. 최윤덕의 말과 같이 지금은 두만강을 따라서 신도시를 건설하며 차근히 방어체계를 갖춰야할 때다.

4월부터 활 1,500개를 만들고, 군사들이 공격과 방어 체계를 쉽게 익히도록 진법을 그림으로 그리고, 하경복 장군의 아들 하한을 함경도 회령 방어 책임자로 임명했다. 하경복은 국경에서 잔뼈가 굵은 장군인데, 그의 아들이 대를 이어 국경을 지킨다고 하니, 생각만해도 마음이 든든하다. 하루는 평안도 국경에 근무하는 이각(61살) 장군이 중풍에 걸려 방에 누워있는 아내를 간호하기 위해서 휴가를 신청했지만 반려했다. 최윤덕 장군도 평안도로 돌려보냈다. 국경의 경계를 늦추면 여진족에게 공격의 빌미를 제공할 수 있다. 10월 30일, 우디캐들이 두만강에 얼음이 얼면 쳐들어 온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한달 후에는 또 다른 여진족 공격한다는 첩보를 입수했다. 예상했던 대로 함경도에 전쟁의 기운이 현실로 바뀌고있다.

 

토벌 이후, 복잡해진 국제정치

10월 12일, 맹날가래·왕흠·왕무 세명의 중국 사신이 서울에 왔다. 도착하자마자, 작년에 올량합에게 빼앗아 온 포로 56명, 소·말 3백마리 그리고 금·은 등 목록을 내보이며 즉시 돌려주라고 한다. 그런데 우리는 이미 모두 돌려줬다. 이 사실은 지난해 조선을 침범한 주동자인 올량합 추장 이만주까지 참여해서 작성한 문서에 명확히 기록했다고 항변했지만, 사신은 우리를 믿지 않는다. 이중에 맹날가래는 작년 8월에도 조선에 와서 조선이 이만주 부족의 말 20마리를 훔치고 이에 대항하는 것을 빌미로, 조선이 이만주가 사는 곳을 공격해서 올량합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잔인하게 죽였다고 지껄였던 자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서 원칙대로 처리하기로 했다. 황제가 보낸 글에 답변하는 원칙은 말이 아닌, 황제가 직접 보는 외교문서에 적어 보내는 것이다.

그랬더니 사신은, 이례적으로 문서 내용을 직접 확인하겠다고 한다. 그래서 작성되면 보여주겠다고 했다. 며칠 후에는 조선 여진족 사신, 이렇게 3자가 같은 날에 황제 앞에서 직접 보고하자고 제안했다. 그리고 또 이틀 후에는 “조선이 돌려 보내지 않은 포로와 재물을 알고 있다”라고 황당한 말을 하며 계속해서 우리를 압박했다. 이후로도 사신은 사사건건 트집을 잡았다. 의심을 받는 것이 불쾌했지만, 외교문서에 작은 비단 한 조각까지 모두 돌려줬다는 사실을 꼼꼼히 적었고, 목록에 적힌 내용은 모두 올량합이 조선과 중국 사이를 이간질하는 것이라고 명확히 표현했다.

나는 왕이 되던 날, “백성에게 원하는 것을 먼저 묻고 나서, 그에 부합하는 정치를 하겠다”라는 비전을 제시했었다. 이 결과로 백성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즐겁게 사는 그런 나라를 만들겠다고 다짐했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내가 먼저 솔선수범하고 나서 나라를 경영하는 방식으로, 변역(變易)하는 정치를 지향해온 것이다. 옛날 중국 한나라 때 황제는 풍속을 변역 시켰더니 백성들과 믿음이 두터워졌다고 하고, 당나라 태종 때는 먼 곳에서 빈손으로 온 손님일지라도 편히 먹고 지내다 돌아갈 정도로 후하게 대하니 관계가 좋았다고 한다. 이처럼 변역하는 정치는 덕(德)과 예(禮)를 갖춰서 사람을 대하는 방식이다. 그런데 여진족은 내가 지금까지 우리 백성 이상으로 후하게 대우했는데도, 틈만 나면 조선을 비난하고 약탈을 멈추지 않는다. “여진족에게는 변역하는 방식을 적용할 수 없는 것인가?”하는 의문이 든다.

올해 들어서 서울에 찾아오는 여진족이 급격히 증가했는데, 이전에는 얼굴도 안 비추던 자들이 섞여있다. 지난해 조선의 군사력을 확인한 후로 저마다 살 길을 모색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스스로 찾아오는 여진족을 우호세력으로 만들기 위해 배불리 먹이고 선물을 후하게 챙겨주고 있다. 그렇지만, 이들은 선물을 받을 때만 좋아한다는 사실을 그동안의 경험으로 이미 알고 있다. 때가 되면, 후하게 대접하는 것은 적당한 선에서 멈추고 입장을 분명히 선택하도록 할 것이다.

내 생각에 중국은 여진족을 껄끄러워 하지만, 조선의 군사력이 북쪽으로 확장되는 것 또한 원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조선과 여진족이 적당한 선에서 힘의 균형을 유지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그래서 이미 모든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 약자인 여진족 편을 들며 우리를 시험하는 것이다. 하루는 술자리에서 사신 왕흠이 나를 황제라고 부르며, 내 의중을 떠보기도 했다.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그렇지만 11월 11일 사신을 보내는 연회 날, 몸이 다시 아파서 세자가 대신 연회를 주관했다. 이제는 매년 찬바람이 부는 때가 되면 어김없이 아프다. 이틀 후에 아픈 몸을 참고 작별 인사를 했다.

북쪽 국경의 여진족 만큼이나, 남쪽 항구를 드나드는 왜인들 상황이 좋지 않다. 경상도 진해 내이포 항구 인근에 360명이 넘는 왜인이 거주하고 있다. 이들 중에 대부분은 대마도에 먹을 것이 없어서 무작정 배를 타고 조선에 몰려온 자들이다. 측은한 마음에 살게 했더니, 그 수가 계속 불어났다. 이 상황을 허조는 “뜰에서 자고 가기를 애걸하는 자가 안방을 차지하려고 한다”는 옛말에 비유하며, 우유부단한 내 결정을 콕 집어 지적한다. 왜인은 상황이 변하면 언제라도 적으로 돌변할 수 있으니, 대비를 단단히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이포와 인근의 김해에 성을 쌓고, 만약에 사태가 벌어지면 우리 백성을 신속히 대피 시키도록 지시했다.

지난 1월, 구리와 철을 가득 싣고 일본에서 돌아오던 우리 사신 일행이 바다 한가운데서 왜적에게 물건을 모두 강탈 당하고 간신히 살아 돌아오는 사건이 있었다. 3월에는 대마도주 종정성이 대장경을 달라는 무리한 요구를 했고, 7월에는 대마도에 납치됐던 우리 백성이 탈출해 왔다. 평상시라면, 이 정도의 왜인 동향은 작은 일로 넘길 수 있다. 그러나 북쪽 국경에 군사력을 집중시킨 지금, 왜인과 불필요한 마찰이 일어나고 큰 싸움으로 번지면, 군사력을 둘로 나눠야 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살얼음판을 걸을 때처럼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하는 때다.

이처럼, 조선 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가 요동치면서 중국·여진족·일본 말과 글을 통역하고 번역하는 사람의 역할이 커지고있다. 이중에 중국어가 우선이다. 2월 6일, 중간관리자급 신하인 이변과 김하, 두 명을 중국어 학습교재인 직해소학을 제대로 배워오도록 중국으로 보냈다. 이중에 김하는 서른 살이 넘어서 중국어를 배우기 시작했는데, ①밤을 세워가며 공부하고, ②중국어를 잘하는 사람을 찾아 다니며 발음을 고치고, ③집에서도 친구를 만날 때도 중국어 사용을 고집했다고 한다. 또한 외국어 통역과 번역을 담당하는 관청인 사역원에서 중국어를 담당하는 직원은 매달 1일과 16일 두 번만 출근하고, 이 외에는 집에서 중국어 공부에 집중하도록 지시했다. 여진족은 군대 힘으로 상대하지만, 중국과의 외교문제는 말과 글로 대처해야 하기 때문이다.

 

 

 

1435년(39살), 적과의 동침

 

적과의 관계 재정립 시작

지금까지는 외국인이 특산물을 가져오면, 덤까지 얹어서 쌀과 생필품으로 바꿔줬었다. 그러나 올해부터는 답례품을 주지 않거나 최소한의 물건만 주기로 방침을 정했다. 2년 전, 여진족과 전쟁이 시작된 이후로 위계질서가 명확해야 안전이 보장된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새해 첫날인 1월 1일, 여진족 추장 이만주가 새해 선물을 보내왔다. 이만주는 1432년에 조선을 침공해서 조선을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은 자다. 그런 자가 거처를 옮겨 다니며 숨어 살다가 선물을 보낸 것이다. 보름 후인 1월 15일에는 이만주가 긴급 정보를 제공했는데, 홀라온 1천명이 조선을 공격하려고 말을 타고 출발했으니 대비하라는 것이다. 간사하고 뻔뻔한 자의 말이어서 믿지않았는데, 정말로 3일 후에 말을 탄 여진족 2,700여명이 평안도 여연성을 포위했고, 90여명의 사상자와 말 60마리가 죽고 나서야 후퇴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그리고 나서 한동안 잠잠하다가 3월 28일, 이만주의 부하 한명이 가족 10명을 데리고 귀순했는데, 이만주가 4월에 조선을 공격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에는 대비를 갖췄지만, 실제로 이만주의 공격은 없었다. 그렇지만, 이만주의 부하 중에 조선에 귀순하는 자가 늘어난 것은 좋은 현상이다. 귀순한 자들의 증언과 증거를 종합해 보니, 1월 15일에 여연을 공격한 자들은 이만주와 연합한 또다른 여진족 홀라온 부족 무리였다. 국경 마을에는 귀순한 여러 여진족이 급격히 증가했고 한 곳에 섞여 살게 됐는데, 남의 것을 약탈해서 생활하던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자기들끼리 물건을 훔치는 등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는다. 이들 중에 적응하지 못하고 고향을 그리워하는 자는 새 옷 한 벌씩을 지어 입혀서 살던 곳으로 돌려 보냈다.

8월, 여진족의 침략이 빈번한 평안도 여연군을 여연부으로 승격시키고 방어를 위해 사람을 모으고 있다. 이곳에 조선 사람이 살지 않으면, 오래전 함경도 회령처럼 한순간에 여진족에게 점령당할 수 있다. 여연은 여진족이 사는 북쪽 방향으로 봉곳이 솟아있는 군사요충지다. 역사책에서 배운 진짜 왕은 국토를 개척하는 것을 나라의 근본으로 삼는다고 했다. 나 또한 그렇다. 다시는 땅을 뺏기지 않을 것이다. 7월, 평안도 여연 아래에 위치한 자성에서 여진족과 전투가 벌어졌는데, 훈련된 군인이 적었음에도 사람을 모아 방어체계를 갖추고 싸우니 이전처럼 사람이 납치되지는 않았다. 가을까지도 여진족의 침입은 멈추지 않았다. 겨울이 되니, 얼음이 언 강을 걸어 건너와서 먹을 것을 구걸하는 자들이 있다. 불쌍하지만, 빈손으로 돌려보냈다. 여진족과 상하관계를 분명하게 구분 지을 때까지는 냉정해져야 한다. 몇 년은 족히 걸릴 것이다.

대마도 왜인에게는 정기적으로 식량을 보내준다. 대마도는 도토리 조차도 씨가 마른 심각한 상황인데, 조선 외에 정상적으로 식량을 구할 방법이 없다. 우리가 도움을 주지 않으면, 또다시 전쟁을 치를 수도 있다. 옛말에 “구석에 몰린 쥐가 고양이에게 덤빈다고 하지 않는가” 배고픔이 한계에 다다르면 또다시 해적으로 돌변할 수도 있기때문이기도 하다. 여기에 더해서 조선에서 식량과 생필품을 구해갈 수 있도록 경상도 내이포 부산포 염포 세 개 항구를 개방하고 일정한 수의 배와 인원이 와서 무역하는 것을 허가했다.

그런데 7월에 조사해보니, 내이포 항구 부근에만 수백 채가 넘는 왜인의 집이 새로 지어졌고, 배를 해안에 정박하고 지내는 자도 수백명이나 된다고 보고한다. 아이를 낳고 기르는 자도 있었다. 물건을 팔러 온 자들이 그대로 눌러앉아 살고있다는 것이다. 다행히 부산포와 염포 항구는 염려할 정도는 아니었다. 9월부터는 무역을 마친 모든 왜인은 즉시 대마도로 돌아가게 조치했다. 돌아가지 않는 자와 기존에 머물러 살고있는 왜인에게는 우리 백성 수준의 세금을 내는 제도를 도입했다. 앞으로도 이렇게 왕래하며(與) 살아야 한다면, 질서를 모르는 왜인을 제도권 안으로 끌어들여 익숙하게 하는 것이 유익할 것이라 판단한 것이다.

 

빠르게 건설된 함경도 신도시

지난해 1월 6일, 함경도 도절제사 김종서가 방어용 신도시 건설계획을 보고했었다. 이 계획은 영북·경원·단천·북청·경성·길주 등 군사요충지에 ①군대를 주둔시키고 ②돌로 성을 쌓고 ③많은 집을 지어 많은 백성을 살게 하는 것이 핵심이었다. 그런데 이곳으로 이사하려는 사람이 없어서 강제로 이주시키는 방법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이 일은 나라의 안위가 걸린 중차대한 일이기에, 왕이 단호하게 집행해야 하는 선무(先務)에 해당한다. 이로 인한 비난은 왕인 내가 책임질 것이다. 1월에 제주도에서 붙잡은 말 소 도둑을 평안도로 보냈고, 6월에는 함경도 아래 지역의 고원·영흥·문천·의천·안변 산골짜기에 사는 사람들을 찾아서 2백 가족은 경성으로, 3백 가족은 길주로 강제 이주시켰다. 경성과 길주는 국경과는 떨어진 곳이다. 그렇지만, 오도리가 국경 부근의 회령 땅을 차지하고 있는 지금은 이곳이 국경에 버금가는 군사요충지다. 이들 중에 도망치는 자와 숨겨주는 자는 군법으로 처벌하라고 단호하게 명령했다.

1년 여가 지난 지금, 신도시 인구가 급격히 증가했다. 사람이 급증하니 하루하루 소비하는 밥 양이 엄청나다. 이들을 배불리 먹일 만큼의 충분한 식량을 국경까지 옮겨야 하는데, 마땅한 방법이 없으니 큰일이다. 비가 내리면 땅이 질퍽 해서 수레바퀴가 굴러가지 않고, 날이 추우면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배를 띄우지 못하고, 눈이 내리면 소가 미끄러진다. 이런 날을 빼고 나면, 일년 중에 곡식을 옮길 수 있는 날이 얼마 되지 않는다. 여기에 더해서 압록강과 두만강은 여진족의 공격을 조심해야 하고, 육로로 옮기자니 북쪽 지역에서는 험준한 산을 넘어야 하는 고된 일이다.

그래도 평안도 관찰사를 지낸 이숙치가 2천석의 쌀을 수로와 육로를 적절히 이용해서 평안도 여연과 강계로 안전하게 운송한 경험이 큰 보탬이 되고있다. 7월에 우선적으로 황해도 쌀 2,000석을 함경도로, 충청도와 경상도 쌀 15,000석을 강원도로 옮겼다. 군량미가 부족할 때, 여진족과 전면전이 벌어지면 때는 늦게 된다. 남쪽에서 생산한 쌀을 계속 북쪽으로 옮겨 저장하는 이유다. 식량 운송 하나만 보더라도, 국경을 방어하는 것은 정말 많은 사람의 피땀 어린 노고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오늘도 식량을 싫은 수레와 배가 국경으로 향하고 있다.

 

덕(德)과 예(禮)에서 시작되는 변역(變易) 리더십

4월 15일, 함경도 도절제사 김종서가 모친의 병을 돌보러 잠시 서울에 왔다. 경복궁 사정전으로 불러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측은한 마음이 들어서, 내가 입고있던 겉옷 홍단의(紅段衣)를 벗어서 그의 어깨와 등을 덮어 줬다. 그리고 어느 날 문득, 작년 6월에 평안도 도절제사 이각(62살)의 휴가를 취소시켰던 날이 떠올라서 미안한 마음에 따뜻한 겹옷 한 벌을 보냈다. 당시 이각 장군이 휴가를 냈던 이유가 평안도와 먼 전라도 고향 집에 중풍으로 쓰러져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전신 불수의 몸으로 1년이 넘도록 방에 혼자 누워지내는 아내가 보고싶었기 때문임을 알면서도 나는 허락하지 않았었다.

그때 이각은 휴가 신청서 내용 중에 영결이란 단어로 내 마음을 흔들었지만, 나는 무정하게 흘려 읽었다. 그때 미안했던 마음이 아직도 남아있다. 영결은 영원한(永 영) 이별(訣 결)을 뜻하는 가슴 시린 글자다. 이각은 아내가 살아있을 때, 아내의 얼굴을 마주보고 “그동안 미안했고 또 고마웠다”라는 말을 아내에게 들려주고 싶었을 것이다. 이각 부부는 부모도 죽었고 자식도 없다. 그때 나는 왕의 임무를 다하기 위해 이각에게 못할 짓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10월 12일, 김종서의 모친이 죽었는데, 한달이 채 안된 11월 6일, 이각의 아내가 죽었다. 김종서는 모친 상을 치르고 복귀할 수 있게 휴가를 줬지만, 이각은 오늘도 눈 내리는 국경을 지키고있다. 김종서와 이각은 조선의 최전방인 함경도와 평안도 국경선을 각각 책임지고 방어하는 군대의 우두머리다. 두 장수가 한꺼번에 국경에 없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 또 한번 이각 장군에게 미안한 결정을 해야만 했다. 국경은 한시라도 냉정함을 잊으면 안되는 그런 곳이다. 만약에 이각의 아내가 먼저 죽었다면, 그를 고향집에 다녀오게 했을 수도 있다. 이각 장군은 변방에 오래 근무한 장군인데 반해 김종서는 내 비서실장 출신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내가 김종서를 편애하고 이각 장군을 미워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사람들이 뭐라 수근 대더라도 나는 변명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런 적이 없기 때문이다. 단, 김종서와는 오랜 시간 함께하며 서로를 잘 아는 만큼 각별한 정이 쌓였다는 점은 부인하지 않는다. 이처럼 부모가 죽어도 아내가 죽어도 집에 다녀가기 쉽지 않은 것이 국경을 지키는 장수의 숙명이다.

그럼에도 국경을 지키는 장수에게 조그만 사건 사고라도 생기면, 서울에 있는 관리들은 트집을 잡고 죄인처럼 대하기 일쑤다. 한 예로, 귀순한 여진족 한명이 지난 1월에 여진족이 평안도 여연에 침입했을 때, 우리 백성 2명을 죽이고 7명을 납치해 갔다는 새로운 사실을 증언하자마자, 평안도 방어 책임자인 이각 장군이 거짓말을 했다고 몰아붙이며 “법대로 처벌해야 한다”라고 주장하고 죄인 취급했었다. 내가 얼마전에 이각 장군에게 겨울 옷 한 벌을 보내준 것은, 서울 관리들에게 이 사건에 대한 내 결정을 표현한 것이기도 했다.

중앙정부 관리들은 똑 같은 잣대를 들이대지만, 서울과 국경은 다르다. 국경을 지키는 장수에게 작은 허물은 언제라도 일어날 수 있고, 어쩔 수 없는 상황일 때도 있다. 왕이 앞장서서 다른 기준으로 고민하고 결정해야 하는 이유다. 이것이 바로 유사시에 왕이 변역을 솔선수범해야 하는 이유가 된다. 지난 2월에는 왕이 건강을 지키기 위해 마시는 술인 향온주 30병을 평안도의 장군들에게 보내서 눈보라 속에 나라를 지키는 노고를 위로하기도 했었다. 내가 굳이 이 말을 꺼내지 않더라도, 지금까지 내 행동을 보아온 이각 장군은 내 속 마음을 알아줄 것이라 믿는다. 옛날부터 변역(變易)하는 정치와 리더십은 “사람을 덕(德)과 예(禮)를 갖춰 진심으로 대하는 행동에서 시작된다”라고 했다.

[3화로 이어집니다]


경묵
김경묵
창의성은 서사를 기능으로 바꿔내는 과정에서 드러난다
삼성전자에서 디자이너로 20년 근무했고, HBR(하버드 비즈니스 리뷰)에 논문을 게재한 유일한 한국 디자이너이다. 지금은 서사를 기능으로 바꿔내는 소프트한 창의성과 The AX Wave에 관한 글을 쓰고, 강의를 하며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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