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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의 변역리더십 (연재 3화, 고비를 넘는시기)

세종의 변역리더십 (연재 3화, 고비를 넘는시기)

변역에는 “내가 먼저 바뀌고 남이 변하기를 기다린다”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세종은 변역하는 리더십의 최강자였다.
조직문화리더임원CEO
경묵
김경묵Dec 13, 2025
29118

덕과 예를 갖추어 주변과 세상을 바꿔낸, 세종의 변역리더십을 연재합니다

변역은 상대에게 덕과 예를 갖추어 설명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설득되게 하는 과정이다. 세종 이도가 책에서 배우고 국가경영에 사용한 방식이었다. 그의 변역리더십이 빛을 발한 때가 있었다. 1432년부너 1438년까지 7년여 동안 여진족과의 혼란했던 상황을 마무리 지은 과정이 그러하다. 세종실록에는 이때의 상황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 연재는 그 하나하나의 기록을 연결해서 쓴 <이도 다이어리>에서 발췌 했다. 필자는 이 책의 저자이다. 자고 나면 새로운 기술적 개념이 등장하고, 우리를 혼란한 상황으로 빠뜨리고 변화를 강요하는 지금, 혼란한 상황 속에서 전략을 짜고 실행하고 결과를 만든 세종 이도의 변역하는 지혜를, 한 가지 해결 방안으로 제시하고 싶다. 이때 그의 나이가 36살이었다.

연재 1화 혼란한 긴급상황, “모두의 생각을 모아야 한다”

연재 2화 균형이 깨진상황, “적과의 동침도 해야 한다”

연재 3화 고비를 넘는시기, “전쟁의 끝이 보인다”

연재 4화 바람처럼 사라진혼란, “비로소 보여진 새벽의 평온”

그리고 연재 총 정리

1436년(40살), 하나씩 드러나는 얽히고 설킨 잠복된 문제들

 

국경 방어 아이디어 공개 모집

평안도 여연은 압록강 강변을 따라서 길게 민가와 농지가 빽빽하게 몰려있다. 이곳에 나무를 뾰쪽하게 깎아서 대각선으로 세운 바리케이드를 길게 설치해서 말을 탄 여진족이 쉽게 뛰어 넘지 못하게 했지만, 아직 허술한 곳이 곳곳에 있다. 여진족은 말을 탄 채로 기습공격하기 때문이다. 바리케이드 주변에도 요새를 구축하고 군인들이 24시간 경계를 늦추지 않고있다. 그럼에도 5월 23일, 말을 탄 여진족 올량합 부족 500여명이 침입해서 농민 14명을 납치하고 말 51마리와 소 34마리를 약탈해 갔다는 보고를 받았다. 이번에도 이만주의 짓이다.

여진족은 압록강 건너편의 풀이 우거지고 높은 곳에 숨어있다가 허술한 틈이 보이면, 기습적으로 강을 건너와서 공격하는 행태를 반복하고 있다. 여진족의 이러한 공격 방식을 알면서도 우리 백성의 피해 없이 방어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 현실이다. 가축을 몰고 나가서 강변에 흩어져서 일하는 우리 농민의 농지가 강을 따라 길게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다. 그래서 여진족의 기습 공격을 받았을 때, 바리케이드 안으로 재빨리 들어오지 못하는 것이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대책 마련이 필요한 때다.

6월 20일, 국경을 방어할 아이디어를 공개모집 했는데 총 97명이 참여했다. 3년 전에 여진족 토벌 작전을 세울 때는 고위급 신하의 생각을 빠짐없이 듣고 반영해서 최선의 결과를 만들 수 있었다. 이번에는 중간관리자급까지 확대해서 모두의 생각을 글로 적은 제안서로 모았다.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정말 많았고, 몇몇 아이디어는 생각지도 못한 발상이어서 미소 짓기도 했다. 눈에 들어온 몇 개를 골라 보면,

①압록강을 따라서 일정 간격으로 높은 탑을 쌓아서 감시하다가 적이 쳐들어 오면 화력을 집중 하는 것 ②고된 일을 앞장서서 하는 사람에게 혜택을 주어 모범으로 삼는 것 ③적이 숨어서 옅 보는 곳의 나무와 풀을 베고 농지로 바꾸는 것 ④우리도 수시로 여진족을 공격해서 여진족을 지치게 하는 것 ⑤적이 타고 온 배를 빼앗아서 독 안에 든 쥐 꼴이 되게 하는 것 ⑥적정 수량의 화포를 추가로 배치하고 사용법을 익힐 것 ⑦농민의 안전지대인 뾰쪽한 나무 바리케이드를 가능한 빨리 돌로 쌓은 성으로 교체하는 것 ⑧근무지로 이동하는 장수가 이동 중에 먹을 식량 이외에 필요한 군복과 장비 운송을 나라에서 책임질 것 ⑨국경을 오가는 사람에게 군사적 임무를 줄 것 ⑩수심이 낮은 강가에 철조망을 치고 못과 같이 뾰쪽한 마름쇠를 흩뿌려 놓아 강을 건너는 적의 침입을 지연시킬 것 ⑪모든 농민에게 활 쏘기 등 군사훈련을 시킬 것 ⑫압록강 건너 여진족이 사는 땅에 바리케이드를 설치하고 군대를 배치해서 적을 두렵게 할 것 등이다. 모든 아이디어를 평안도군사령관(절제사) 이천에게 보내서 현장의 검토의견을 듣도록 했다.

 

국경에 농사짓는 농민들의 고단한 삶

농부는 가을에 추수를 마쳤다고 해서 1년 일을 끝낸 것도 아니다. 마음을 놓고 쉴 수도 없다. 정기 군사훈련, 성을 쌓는 노동 등 산더미처럼 쌓인 나라의 일들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무기 창고에 보관된 무기를 수리하는 일도 해야 한다. 이처럼 농부는 언제라도 나라가 부르면, 노동자가 되기도, 군인이되기도 하는 고단한 신분의 사람이다. 최근에 농민 신분을 이해하기 쉬운 사연이 하나 있다. 여진족을 토벌하니, 헤어져 살던 가족이 다시 만나게 됐다. 그런데, 10살 때 여진족에게 납치된 김오미라는 남자는 엄마를 보고도 반가워하지 않았다. 그는 납치된 이후에 여진족 여자와 결혼하고 천명 이상의 여진족을 거느린 천호(千戶)라는 지위에 오르고, 호화롭게 살고 있었다, 그런데 조선으로 돌아와서 만난 가족이 가난한 농부였고, 졸지에 조선의 농부라는 고단한 평민신분으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이와 반대로 여진족의 노비로 힘들게 살았던 사람들은 조선에 돌아와서 가족과 만날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8월 25일, 함경도 회령에 여진족 홀라온과 우디캐 무리가 침입해서 농민을 납치해서 달아났다. 다행히 이징옥 장군과 회령에 사는 여진족인 오도리들과 함께 추격해서 모두 되찾아 왔다는 보고를 받았다. 적진의 지형을 잘아는 오도리가 길을 안내했기에 가능했다. 오도리가 우리를 도운 이유는 4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에 우디캐 무리가 회령에 침입해서 오도리 추장 동맹가첩목아를 죽였기 때문이다. 추장 동맹가첩목아가 죽은 이후로 오도리 부족은 동범찰과 동창이 이끌고 있다. 이자들은 자기들의 이권에 따라 아침 저녁으로 마음을 바뀌는 자들이다. 언제라도 배신할 수 있다는 점을 경계하고 있다. 그렇지만 다행인 점은, 오도리 부족이 함경도 회령을 지키는 이징옥 장군을 두려워한다는 것이다. 이징옥은 용감하고 엄격한 장수다.

9월 26일, 함경도 회령에 돌로 쌓은 성이 완성되니 이제 어느정도는 안심이 된다. 회령은 함경도 두만강 국경에 신도시를 추가로 건설하기 전까지만 해도 함경도의 최전방 역할을 담당했던 곳이다. 회령성 둘레가 약 1,180m이고 높이가 약 4.5m이다. 올해 가을에 한달 동안에만 동원된 농민 노동자가 20,300명에 달한다. 회령에 성이 완공되던 날, 3,000여명의 여진족 우디캐 무리가 함경도 경원 신도시에 또 쳐들어왔지만, 이번에는 빈손으로 돌아갔다는 보고를 받았다.

조선과 여진족이 수년 동안 국경을 사이에 두고 싸우고 있지만, 이와 별개로 조선 농민과 여진족 농민 사이에는 오래전부터 끈끈하고 우호적인 관계가 형성돼있다. 이들은 오랜 시간 동안 강을 넘나들며 농사를 지으며 섞여 살아 왔기 때문에, 니편 내편 구분이 없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농민들끼리는 서로의 집에서 먹여주고 재워주는 일이 흔하다. 우리 농민의 집에서 여진족이 붙잡혔다고 해서 우리 농민을 무턱대고 처벌할 수 없는 이유다. 이런 일은 언제라도 일어날 수 있기에, 현장 지휘관에게 처리를 일임하고 있다. 또한 국경과 같이 특수한 지역에 토관이라는 특별 관직을 임명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동안 토관이 없었던 함경도 경성에 토관을 추가로 임명해서 현장관리를 강화했다.

 

어디를 어떻게 변역(變易)해야 하나?

5월 9일, 함경도 4개 신도시에서 2년동안 3,262명이 전염병으로 죽었다는 보고를 받았다. 아직 도시 기반시설이 제대로 정비되지 않고, 위생상태가 엉망이고 좁은 곳에서 낯선 사람들이 뒤섞여 생활한 것이 원인인 것 같다. 지난해 가을에 하경복이 전염병으로 죽은 함경도 사람이 수만 명이나 되고 사람 뼈와 해골이 들판에 널려있다고 보고 했었는데, 이 말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확인됐다. 하경복이 무슨 이유로 과장된 말을 했는지 모르지만, 아무것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오랫동안 국경에서 근무한 그냥 그를 쉬게 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그의 관직을 파면하고, 늙은 모친이 있는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명령했다.

하경복과 나의 인연은 특별하다. 그는 나의 거듭된 명령으로 젊어서부터 줄곧 국경을 지키는 임무를 맡아왔기에, 모친이 늙도록 얼굴조차 잊고 살아왔다. 그런 그의 나이도 어느덧 60살이 됐다. 그도 따뜻한 방의 아랫목과 집 밥이 그리울 것이다. 하경복을 고향으로 보내고 오래전에 그와 주고받은 편지를 꺼내 읽었다. 하경복이 “뼈에 새겨 보답하겠습니다”라고 적은 대목에서 다시 또 콧등이 시큰해지는 감정이 느껴진다. 우리가 왕과 신하 사이로 만났지만 “사내들 사이의 우정이란, 이런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하는 밤이다. 다른 장수들 또한 오랫동안 가족과 떨어져 지내고 있기에,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친 상태일 것이다. 사기를 충전할 대책이 절실하다. 우선 검증된 방법인, 군대의 오래된 관습대로 군부대에 기생을 두어 아내가 없는 군인을 위로하게 했다.

벌써 몇 년째 평안도와 함경도 국경지역으로 백성 군인 관리 등 국민을 강제 이주시키고 있다. 올해도 처제와 간통한 남자를 평안도 여연 군대에 편입시켰고, 평안도 남쪽에 살던 211가족을 평안도 북쪽인 여연 등지로 이주시켰고, 평안도 아래 지역에 근무하던 하급관리 15가족을 북쪽인 여연과 자성에 배치했다. 함경도는 두만강 강변을 따라서 군사 요충지에 회령·종성·경원·공성(경흥) 4개 신도시가 빠르게 건설됐고 2,000여채의 집이 새로 지어졌다. 이처럼 국경 지역에 사람이 급격히 증가하니, 식량 또한 빠르게 소비되고 있다. 한 예로 윤6월 23일 현재, 평안도 여연·강계·자성의 창고에 보관된 곡식이 4만여 석에 불과하다. 이 정도는 9만 명에 달하는 군인이 두 달 정도 버틸 수 있는 양 밖에 안된다. 가을이 오기 전에, 곡식이 바닥나게 되는 긴박한 상황인 것이다. 함경도 상황도 다르지 않다. 전쟁이 4년을 넘어가니, 국경을 지키는 장교와 병사, 관리와 백성 모두가 배고픔과 긴장 속에 지친 상태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남쪽 창고에 지정된 곡식을 최대한 빨리 최대한 많이 북쪽 국경으로 옮겨야 한다. 그래야 배고픔만큼은 면하게 할 수 있다. 내 마음이 급해지고 있다. 배고픔은 익숙해 질 수 없는 고통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서 남쪽 대마도와 일본의 정세에 변화가 생겼다. 일본에서는 자기들끼리 전쟁을 벌였고, 패배한 세력이 대마도로 도망쳐서 숨어 지내고 있는데, 승리한 세력이 대마도까지 쳐들어 올 수도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이 정보가 현실이 되고 대마도에서 큰 싸움이 벌어지면 일본 군대가 조선의 코 앞까지 진출하는 것이다. 그리고 패배한 세력이 대마도와 가까운 경상도로 도망쳐 올 수도 있는 급박한 상황이 현실이 될 수도 있다. 그런데 지금 경상도는 20년 가까이 왜적의 침입이 없어서 방어체계가 허술하다. 지난 5월에 관직에서 파면시킨 하경복 장군을 급히 경상도에 배치했고, 해안가 마을의 수령을 무관출신으로 바꿔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게 했다. 무관 출신은 싸움은 잘하지만, 관리와 행정 역량이 부족하다. 지금 당장 ①관리와 ②국방,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을 수 있는 대안이 없기 때문에, 백성이 겪을 관리와 행정상의 불편함은 어쩔 수 없이 감수해야 하는 작은 일로 변했다. 여기에 또 엎친데 덮친 격으로 올해는 일년 내내 비가 내린 날이 한 손가락으로도 꼽을 정도다. 지금까지 한번도 겪어보지 못한 최악의 가뭄과 흉년이 현실이 된 것이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특단의 대책을 마련해야 하는 곳이 한두 곳이 아니다.

이처럼 최악의 상황들이 한꺼번에 찾아오니, 어디서부터 고치고(變) 어떻게 바꿔야(易) 지금의 난관을 헤쳐 갈수 있을지, 방법이 떠오르지 않고 막막하기만 하다. 변역(變易)하는 방법을 찾지 못하니, 나도 신하도 매일같이 긴장한 상태로 발등에 떨어진 급한 불을 끄기에도 바쁜 한해를 보내고있다. 오늘도 모여서 고민만 하다가 밤이 찾아 왔고, 신하도 집으로 돌아가고 나도 내 방으로 돌아오는 일상을 반복했다. 한계 상황을 경험하고있다.

 

 

 

1437년(41살), 고비를 넘기며, 비로소 보여지는 전쟁의 끝

 

모래 알갱이 같이 흩어진 여진족들

3월 11일, 여진족 우디캐 무리가 수개월 전부터 함경도 국경을 자주 침범하고 있다. 신하들은 지금이 우디캐 무리를 응징할 적기라고 거듭해서 보고한다. 이미 1년 전에 여진족을 응징해도 된다는 중국 황제의 허가를 받아 놓았기에, 내가 공격명령을 내리기만 하면 즉시 군사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상태다. 중국이 군사작전을 허가한 배경은 수년 동안 중국과 신뢰를 쌓아온 우리의 노력과 여진족이 조선을 침탈한 실상을 중국이 명확하게 알게 된 결과다. 그러나, 나는 함경도에 건설한 신도시가 아직 안정되지 않았고, 우디캐에 버금가는 홀라온 세력을 견제해야 하는 등 도처에 변수가 도사리고 있어서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며 시간을 흘려 보내고 있다. 여기서 내 성격을 잠깐 언급하면, 나는 급박한 상황에서도 침착하게 실무자의 말을 끝까지 듣고 판단하는 것에 익숙한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책 읽기를 즐기며 마음을 가다듬는 시간을 가지면서 생긴 습관이다. 지금 이 시간에도 신하는 질문과 토론은 이제 그만하고 당장 결단을 하고 공격 명령을 내리라고 재촉한다.

4월 11일, 함경도군사령관(절제사) 김종서가 우디캐 토벌계획을 보고했다. 함경도에서 우디캐가 거주하는 수빈강까지 가는 길에 노루와 사슴이 많이 서식하니, 사냥하러 가는 것처럼 위장하고 이동하면 적이 눈치채지 못할 것이라고 한다. 공격 시기는 9월 추수 시기를 제안했다. 만약 적이 도망치면, 그들이 농사지은 곡식으로 밥을 지어 먹는 이점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중앙정부 관리는 불안한 계획이라는 의견을 냈다. 때를 놓치지 않으려는 현장의 군인(武)과,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신중을 기하려는 중앙정부 관리(文)의 의견이 내 머리 속만큼이나 대립하고 있다. 나 또한 어느 한쪽의 의견이 탁월하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 있지만, 시급히 결정해야할 사안인 것만큼은 분명하다. 함경도 문제를 고민하는 와중인 5월 6일에 평안도에 말을 탄 여진족 올량합 부족 300명이 침입해서 전투가 벌어졌다는 보고를 받았다.

내가 우물쭈물 하는 사이에 평안도와 함경도 국경에 여진족의 침입이 끊이지 않다 보니, 민심이 급격히 악화되고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 백성은 함경도 회령에서 20여년 동안 어울려 살아온 여진족 오도리 부족을 화풀이 대상으로 삼고, 욕하고 때리는 사건이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이러한 결과로 근래에 오도리 부족의 추장 동범찰이 부족을 이끌고 두만강 건너 땅으로 떠나려는 시도를 하기도 했다. 내가 빨리 결정하지 못하고 있는 사이에 악화된 민심을 가라 앉힐 방법도 고민해서 찾아야 하는 문제가 또 하나 추가됐다.

하루는, 오도리 추장 동범찰이 직접 서울까지 나를 찾아왔다. 그리고 지금 살고있는 함경도 회령에서 조선 국경너머로 이주하고 싶다고 말하며, 내 생각을 물었다. 그러면서, 동범찰은 그동안 원수처럼 지냈던 우디캐 부족과는 화해했다고 말하며, 그동안 우리 백성에게 당한 설움을 토로했다. 정작 오도리들이 우리 백성에게 저지른 잘못은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오도리들이 지난 수십년 동안 조선땅에 살면서 나와 우리 백성에게 받은 호의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역시 동범찰은 믿지못할 여진족이다. “하고싶은 대로 해라”라고 대답하고 돌려 보냈다.

9월 1일, 우디캐와 홀라온 연합세력이 조선을 공격할 것이라는 첩보를 입수했다. 그렇지만 전날에 우디캐와 홀라온 무리의 몇몇 추장이 합당한 대우를 해주면, 조선에 귀화하겠다는 문서를 보내왔다. 지난 6월에는 한번도 본적 없는 수빈강 강가에 사는 여진족 추장이 특산물을 가져오기도 했었다. 지금 여진족들은 조선과 계속 싸우려는 강성주의자들과 조선에 귀화해서 살아 남으려는 자들이 이합집산을 하고있는 것인가? 그래서 강성주의자들이 더 날뛰고 있는 것인가?

 

오해를 줄이는 왕의 리더십

6월 19일, 평안도군사령관(절제사) 이천에게 여진족 올랑합 이만주 무리를 토벌할 모든 권한을 위임했다. 그리고 ①이만주가 숨어있는 은신처를 파악한 후에 출정하고, ②이번 공격에 실패하면 다시 공격하기 어려울 것이니 눈에 보이는 적을 모조리 사살하고, ③곡식을 불태우고 집을 헐어버리고 재산을 빼앗아 오라고 명령했다. 야만적인 적을 토벌할 때는 싹 쓸어 버리는 것이 상책이다. 훗날에 이날을 떠올려 보니, 내 말 속에 여러 해 동안 여진족에게 쌓인 내 감정이 섞여 있었고 평소의 나답지 않게 흥분한 상태였던 것 같다. 6월 30일, 이천에게 세부 작전계획을 보고받았는데 아직도 이만주가 숨어사는 곳이 명확하지 않다. 은신처를 알아내기 위해 아홉 번이나 정탐을 보냈는데, 한 명만 살아서 돌아왔다고 한다. 그렇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이만주가 어디에 살건 추수할 곡식을 버리고 멀리 도망가지 못한다는 점이다. 이제 방법은 토벌하는 것 하나밖에 없다. 이 작전은 비밀유지를 철저히 해야하기에, 내가 공격명령을 내린 사실을 아는 사람은 몇명 뿐이다.

9월 7일, 드디어 7,793명의 군사를 세 부대로 편성하고 평안도 강계에서 압록강을 건넜다. 보름 후인 9월 22일, 적을 소탕했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올량합 무리가 우리 공격을 알아채고 산으로 숨어서 대규모 전투는 없었고, 여진족 60명을 사살하고 집과 식량을 모조리 불태웠다고 보고했다. 이 보고를 들은 일부 신하는 “이정도 승리는 300명 정도의 군인만 갔어도 가능한 일”이라고 폄하하며 숙덕거린다. 이런 뒷담화를 하는 신하는 대체로 욕심이 많은 자들이다. 한 예로, 몇일 전에 조선에 귀순하겠다고 찾아온 여진족 일행에게 내가 비싼 안장을 얹은 말을 선물했었다. 그랬더니, “여진족에게 비싼 선물을 주면 다른 여진족이 너도나도 찾아오게 되고, 그러면 나라의 경비가 부족해진다”라고 걱정하는 말을 했었다. 그렇다면, “모자란 경비를 당신들이 분담하면 어떻겠느냐”라고 내가 물었더니, 순간 조용해졌던 자들이다.

10월 27일, 평안도 도절제사 이천이 서울에 왔다. 승리를 하고 돌아왔는데, 어깨가 처지고 기가 죽어있는 모습이 안스러웠다. 이천은 이기고도 아쉬운 마음이 있었을 것이고 또한 주변의 차가운 시선을 의식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오랜 시간 떨어져 있던 친구를 만난 것처럼 반갑게 맞이하고 해가 지는 줄도 모르고 맛있는 음식을 함께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헤어졌다. 그가 방을 나갈 때 열어둔 방문을 닫지 않고, 노을에 길게 드리운 그의 그림자 끝이 사라질때까지 왕의 일터인 사정전 방안에서 끝까지 지켜줬다. 이천이 평안도로 돌아가는 날에 다시 가까이 불러서 겨울 옷 한 벌을 손에 들려서 보냈다. 열흘 전에 보았던 야윈 모습과 달리, 오늘은 조금이나마 기운을 차린 것으로 보여 흐뭇하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사소한 것이라도 언제라도 요청하라고도 했다.

국경은 중앙정부와 달리, 한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곳이다. 그래서 과정 전체를 들여다 보고, 신중히 판단해야 한다. 결과만 가지고 책임을 따질 수 없는 이유다. 그래야 먼 곳에서 일하는 신하의 마음을 얻을 수 있고, 왕의 실수를 줄일 수 있다. 그리고 한마디 더하면, 모든 말이 귀한 것이 아니다. 뒷담화를 하는 자들의 말은 항상 조심하고 또 조심해도 과하지 않다. 때로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 버려야 하는 말도 있다.

지난 1443년에 이은 두번째 여진족 토벌에서도 이만주를 죽이지 못한 것은 아쉬움이 남는다. 그렇지만, 이제까지 조선이 싸운 방식과는 다르게 집과 식량을 불태우고 눈에 띄는 적을 모두 사살했기에, 여진족 올량합 무리가 조선의 변화에 느낀 두려움이 충분히 컸을 것이다. 이번 공격에서 보여준 조선 군대의 거친 행동이 다른 여진족 부족들 사이에 퍼지면서, 여진족 전체가 당황하고 술렁이는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인지, 토벌 이후로 귀순해오는 여진족과 조선에 우호적인 행동을 하는 여진족이 눈에 띄게 많아졌다. 어쩌면, 여진족과의 전쟁이 얼마 안 가서 의외로 쉽게 끝날 것 같은 느낌이다.

지난 8월에는 변함없이 함경도 군절제사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고 있는 김종서와 편지를 주고받았다. 김종서에게 보낸 편지는 내 말을 세자 향이가 또박또박 받아 쓴 장문의 편지다. 국방에 관한 이슈와 내 생각을 세자에게 알려 주려고, 일부러 상세한 부분까지 설명한 긴 말이기도 하다. 이 글을 읽은 김종서는 내 의도를 알아채고 상세한 부분까지 길게 쓴 글을 보내왔다. 24살 세자 향이가 55살 김종서와 대화하듯 주고받은 편지를 통해 국경 상황을 이해하는데 조금의 보탬이 되었으리라, 이렇게 편지를 주고받은 이유는 오래전에 아버지(태종)가 나에게 황희를 연결해준 것처럼, 나도 세자 향이에게 김종서를 내 방식으로 연결해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지금 황희가 영의정이 되어 나를 보필하듯이, 훗날 김종서가 세자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기를 희망해본다. 김종서에게 내가 입는 옷 한 벌을 선물로 보냈다.

[4화로 이어집니다]


경묵
김경묵
창의성은 서사를 기능으로 바꿔내는 과정에서 드러난다
삼성전자에서 디자이너로 20년 근무했고, HBR(하버드 비즈니스 리뷰)에 논문을 게재한 유일한 한국 디자이너이다. 지금은 서사를 기능으로 바꿔내는 소프트한 창의성과 세종실록 그리고 The AX Wave에 관한 글을 쓰고, 강의를 하며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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