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실리콘밸리에서 “개발자 채용은 줄고 Sales 인재를 찾는 기업은 늘고 있다”는 내용의 강의를 들었습니다. 처음에는 다소 의외였습니다. Sales라니. AI 시대의 실리콘밸리라면 당연히 AI를 가장 잘 다루는 개발자가 높은 평가를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조금 더 깊이 생각해보면 이유는 분명했습니다.
AI의 발전으로 제품과 콘텐츠를 만드는 일은 과거보다 훨씬 쉬워졌습니다. 이전에는 여러 명이 오랫동안 분업해야 했던 일을 이제는 소수가 AI를 활용해 빠르게 완성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렇게 만들어진 제품과 서비스가 넘쳐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이제 희소한 것은 ‘만드는 능력’만이 아닙니다. 고객의 선택을 받고, 신뢰를 얻으며, 관계를 이어가는 능력이 더 중요해지고 있습니다.
NVIDIA CEO 젠슨 황이 최근 연이어 한국을 방문해 주요 기업의 리더와 정부 관계자들을 직접 만난 것도 이런 변화를 보여줍니다. 압도적인 제품력을 보유하고 있어도 고객을 직접 만나 관계를 만들고, 함께 더 큰 아젠다를 만들어가는 Sales의 중요성은 줄어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커지고 있습니다.
최근 링글이 주최한 HR 웨비나에서 이승훈 링글 공동창업자는 AI로 Build의 진입장벽이 낮아진 반면, 고객에게 도달하는 Distribution과 Sales의 희소성은 오히려 커지고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AI가 Sales 활동을 보조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고객을 이해하고 신뢰를 쌓으며 관계를 형성하는 일, 복잡한 이해관계를 조율하고 협상하는 일은 여전히 사람의 역할이 큽니다.
과거 실리콘밸리에는 압도적으로 좋은 제품을 만들면 고객이 자연스럽게 찾아온다는 ‘Product First’에 대한 강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누구나 비슷한 수준의 제품을 빠르게 만들 수 있게 되면서 제품력만으로 차이를 만들어내기 어려워졌습니다.
결국 다시 고객에게 가야 합니다.
고객을 더 자주 만나고, 고객의 문제를 더 깊이 이해하며, 경쟁사보다 더 적합한 해결책을 제공해야 합니다. 쉽게 대체될 수 없는 관계도 만들어야 합니다.
AI 시대의 Sales는 완성된 제품을 잘 설명하는 역할에 머물지 않습니다. 고객의 문제 안으로 직접 들어가 필요한 것을 이해하고, 그 요구를 제품과 기술에 연결하며, 고객과 함께 성과를 만들어내는 기술·전략 영업으로 진화하고 있습니다.
웨비나에서 소개된 Palantir의 Forward Deployed Engineer가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이들은 이미 만들어진 제품을 들고 고객을 설득하는 전통적인 영업사원이 아닙니다. 고객의 실제 데이터와 문제를 현장에서 이해하고, 솔루션을 함께 구현한 뒤 그 경험을 다시 제품에 연결합니다. 만드는 사람과 파는 사람의 경계를 허물고 고객 가까이에서 Build와 Sell의 순환을 빠르게 돌리는 것입니다.
ServiceNow의 사례도 흥미로웠습니다. ServiceNow는 AI를 고객을 덜 만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고객 미팅을 준비하는 반복 업무를 AI로 줄이고, 확보한 시간을 고객의 사업을 더 깊이 이해하고 관계를 구축하는 데 사용합니다.
이 사례들이 전하는 메시지는 명확합니다.
AI의 목적은 사람을 만나지 않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더 잘 만나기 위한 시간을 확보하는 데 있습니다.
Sales라는 단어를 들으면 대개 외부 고객을 상대하는 영업조직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고객의 문제를 발견하고, 적합한 해결책을 제안하며, 신뢰를 바탕으로 행동의 변화를 끌어내는 일이 Sales라면 HR에도 같은 역량이 필요합니다.
HR의 고객은 내부 직원과 현장 리더입니다. 이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제품을 만들고 고객을 만나며 회사의 매출과 성과를 만들어갑니다.
좋은 제도를 만들었다고 구성원이 자연스럽게 환영하며 활용하는 것은 아닙니다. 좋은 교육을 개설했다고 직원의 역량과 행동이 저절로 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HR Analytics 플랫폼에 유용한 지표를 담았다고 경영진과 현장 리더가 즉시 의사결정에 활용하는 것도 아닙니다.
HR이 만든 제도와 서비스도 결국 내부 고객에게 선택받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제도를 잘 설계하는 것만큼 현장에 그 필요성을 설명하고, 실제 문제에 맞게 조정하며, 지속적인 활용과 변화를 끌어내는 과정이 중요합니다.
지금 HR에 필요한 것은 새로운 제도를 하나 더 만드는 일이 아니라, 현장과 일하는 방식을 바꾸는 것입니다.
현장을 더 자주 찾아가야 합니다.
구성원과 리더의 이야기를 더 깊이 들어야 합니다.
요청받은 내용을 처리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말로 표현되지 않은 문제까지 이해해야 합니다.
정답을 일방적으로 전달하기보다 현장과 함께 해결책을 만들어야 합니다.
한 번의 지원으로 끝내지 않고 실행 결과를 확인하며 관계를 이어가야 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친절한 서비스를 제공하자는 의미가 아닙니다. 내부 고객의 만족도를 높이는 데 그치지 않고, 현장이 더 빨리 움직이고 더 좋은 성과를 만들도록 돕는 HR의 전략적 고객 서비스입니다.
웨비나는 AI 시대의 HR을 기존 기능을 안정적으로 운영하는 조직이 아니라, 현업의 속도·생산성·성과를 높이는 Business Enabler로 설명합니다. 채용·교육·평가를 얼마나 많이 운영했는지가 아니라 현업이 더 잘 만들고, 더 잘 판매하며, 더 높은 성과를 내도록 어떤 변화를 만들어냈는가가 HR의 새로운 평가 기준이 된다는 것입니다.
과거 HR은 제도와 정책을 만들고 문의에 답하는 역할에 익숙했습니다. 현업이 요청하면 처리하고, 문제가 발생하면 규정과 절차에 따라 대응했습니다. 앞으로는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현장이 무엇을 요청했는지만 들어서는 안 됩니다. 왜 그런 요청을 했는지, 그 요청 뒤에 어떤 사업과 조직의 문제가 있는지 이해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현장에서 “채용이 필요하다”고 말할 때 즉시 채용 절차를 시작하는 것이 정답은 아닐 수 있습니다. 실제 문제는 업무 분장의 불균형일 수도 있고, 반복 업무의 자동화가 부족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핵심인재에게 충분한 권한이 주어지지 않았거나, 기존 인력이 가진 역량이 적절하게 활용되지 않는 상황일 수도 있습니다. HR은 요청을 접수하고 처리하는 역할을 넘어, 현장의 비즈니스 맥락을 읽고 사람·조직·업무·AI를 함께 재설계하는 파트너가 되어야 합니다.
웨비나에서는 Netflix의 HRBP를 Business Leader의 Strategic Thought Partner로 소개했습니다. HRBP는 비즈니스 아젠다를 이해하고 이를 인재전략으로 전환합니다. 또한 리더가 더 좋은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질문하고 개입합니다. HR의 KPI도 HR 기능을 얼마나 안정적으로 운영했는가에서 Business Performance에 얼마나 기여했는가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앞으로 좋은 HR을 판단하는 기준도 달라질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구성원과 리더가 HR을 자주 찾는가. 그 대화는 얼마나 깊으며, 실제 변화와 성과로 이어지는가.
HR이 보낸 안내문의 수나 운영한 프로그램의 수보다, 현장에서 먼저 상의하고 싶은 파트너가 되었는지가 더 중요한 기준이 될 수 있습니다.
AI는 HR의 많은 업무를 대신할 수 있습니다. 데이터를 정리하고 보고서 초안을 작성하며, 반복 문의에 답하고 이상 징후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AI가 “성과가 하락했다”는 신호를 찾아주더라도 그 원인이 개인의 역량인지, 역할 배치인지, 리더십인지 판단하는 일은 사람에게 남습니다. 다른 기회를 줄 것인지, 역할을 바꿀 것인지, 어려운 사실을 어떻게 전달할 것인지도 인간의 판단과 관계 역량이 필요한 영역입니다.
AI 도구를 잘 사용하는 것이 HR의 필요조건이라면, AI가 확보해준 시간으로 판단·소통·관계 형성과 같은 사람만의 일을 잘 수행하는 것은 충분조건입니다. 결국 HR에 대한 중요한 평가는 더 많은 리더가 HR을 자주 찾는지, 그리고 얼마나 깊은 대화를 나누는지에 달려 있다는 것이 웨비나의 핵심 메시지였습니다.
AI가 절약한 시간은 다시 사람에게 투자되어야 합니다.
보고서 작성 시간을 줄였다면 현장 리더와 한 번 더 대화해야 합니다.
반복 문의를 자동화했다면 구성원의 숨은 불편을 더 깊이 들어야 합니다.
데이터를 빠르게 분석했다면 결과를 함께 해석하고 실행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써야 합니다.
제도를 효율적으로 운영했다면 내부 고객의 실제 경험이 달라졌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AI 도입의 진짜 성과는 HR 담당자가 얼마나 많은 업무를 자동화했는지가 아닙니다.
자동화로 확보한 시간을 내부 고객과의 더 좋은 접점으로 전환했는가에 있습니다.
AI 시대에는 기술을 잘 다루는 능력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기술이 보편화될수록 그것만으로 차별화하기는 어려워집니다. 오히려 고객을 이해하고, 복잡한 요구를 구조화하며, 신뢰를 만들고, 여러 사람을 설득해 실행을 끌어내는 Sales 역량이 더 희소해집니다.
이것은 영업조직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HR도 제도와 서비스를 내부 고객에게 일방적으로 제공하는 공급자의 자리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현장을 한 번 더 찾아가고, 요청 이면의 이유를 물어야 합니다. 데이터와 실제 경험의 차이를 확인하고, 해결책을 함께 만들며, 실행 결과까지 살펴야 합니다.
어쩌면 이것이 AI 시대에 가장 오래 남을 HR의 경쟁력일지도 모릅니다.
AI가 더 많은 것을 만들수록 사람은 더 잘 연결해야 합니다. AI가 더 많은 답을 내놓을수록 HR은 더 좋은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AI가 더 많은 시간을 절약해줄수록 우리는 그 시간을 다시 사람과 현장에 돌려주어야 합니다. 결국 AI 시대에 인정받는 HR은 AI를 가장 많이 사용하는 HR이 아닐 것입니다.
현장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내부 고객의 문제를 이해하고, 더 좋은 관계를 통해 실제 성과를 함께 만들어내는 HR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