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대병원 종양내과 김범석 교수의 『죽음은 직선이 아니다』는 교양의학서임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인문학적 성찰과 조직문화 측면의 혜안을 담고 있다. 이 책은 죽음을 이야기하지만, 역설적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와 '어떻게 함께 존재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게 만든다. 특히 저자가 묘사하는 암세포와 정상 세포의 치열한 사투는 현재 우리가 몸담고 있는 조직과 조직문화에 의미있는 통찰을 제공한다.

암 치료제의 발전사는 ‘세포독성항암제 → 분자표적항암제 → 면역관문억제제’ 로 이어진다. 각각의 특성에 대한 설명은 그 자체로도 흥미로왔지만, 조직문화의 여러 양상과 비교해 보니 나름 의미가 있었다.
초기 암 치료를 지배했던 세포독성항암제는 한마디로 '융단폭격'이다. 암세포가 빨리 증식한다는 점에 착안해 빨리 자라는 모든 세포를 공격한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우리 몸의 소중한 정상 세포(머리카락, 점막, 백혈구 등)까지 초토화된다는 점이다.
이를 조직문화에 대입하면 '성과 중심의 공포 경영'과 닮아 있다. 실적이 낮은 부서를 무차별적으로 압박하거나, 결과가 좋지 않으면 과정에 상관없이 징벌적 조치를 취하는 문화다. '암세포(성과 부진)'는 잡을지 몰라도, 조직의 건강한 동력인 '정상 세포(핵심 인재)'들까지 번아웃을 겪고 회사를 떠나게 만든다. 머리카락이 빠지고 구토가 나듯, 조직원들은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며 창의성보다는 '생존'에만 급급해진다. 이 단계의 조직은 겉으로는 성과를 내는 듯 보이지만, 내부 시스템은 서서히 무너져 내리는 독성 상태에 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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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학기술이 발달하며 특정 유전자 변이만을 골라 공격하는 표적항암제가 등장했다. 정상 세포의 피해를 최소화하고 암세포의 급소만을 찌르는 비약적인 발전이었다.
조직관리 측면에서 이는 '데이터 기반의 정밀 경영'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명확한 KPI를 설정하고, 문제의 원인이 되는 특정 프로세스나 개인을 정밀 타격하여 수정한다. 불필요한 낭비를 줄이고 효율을 극대화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암세포는 영악하다. 표적 치료를 받으면 금세 우회 경로를 찾아내 '내성'을 키운다. 조직도 마찬가지다. 특정 수치만을 강조하는 정밀 타격식 관리는 구성원들로 하여금 '수치만 맞추면 된다'는 식의 내성을 만든다. 겉으로는 지표가 개선된 것 같지만, 문제는 다른 곳으로 전이되거나 더 기형적인 형태로 나타난다.
최근 암 치료의 가장 힙한 패러다임은 면역항암제(면역관문억제제)다. 암을 직접 공격하는 대신, 암세포가 우리 몸의 면역세포(T세포)를 속여 '나를 공격하지 마'라고 보내는 신호를 차단한다. 즉, 우리 몸의 면역 체계가 스스로 암을 찾아내 공격하게 만드는 방식이다.
이는 현대 조직이 지향해야 할 '회복탄력적 조직문화'와 맞닿아 있다. 이런 조직은 리더가 일일이 문제를 지적하고 해결하지 않는다. 대신 조직 내에 '면역 체계(건강한 소통과 심리적 안정감)'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게 막는 '장애물'을 제거해준다. 구성원들이 스스로 문제를 발견하고, 서로 피드백을 주고받으며, 잘못된 방향을 자정(Self-correction)하는 문화다. 암세포라는 위협이 닥쳐도, 건강한 T세포(구성원)들이 알아서 방어망을 구축한다. 구글의 아리스토텔레스 프로젝트에서 발견한 '심리적 안전감'이 바로 조직의 면역 체계를 활성화하는 핵심 촉매제다. 비난받을 공포가 사라질 때, 구성원들은 비로소 유기적으로 협력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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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세포가 조직을 만드는 이유를 명확히 짚어준다. ‘혼자서는 살 수 없기에, 여럿이 모여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 생존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모여서 함께 일하고 조직을 만드는 이유는 간단하다.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들을 여럿이 함께하면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점은 세포도 똑같다.
혼자서 생존하는 일보다 여러 세포가 모여 조직을 만들고 개체를 만들어서
유기적으로 협력하며 조화롭게 공생하는 일이 생존에 훨씬 유리하다.
따라서 세포 하나가 없어져도 돌아갈 수 있는 전체의 시스템을 구축하는 일이
생명을 유지하는데 중요하다.
조직도 마찬가지다."
여기서 암세포의 본질이 드러난다. 암세포는 사실 '협력을 거부한 이기적인 세포'다. 전체 시스템의 안위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자신의 증식만을 위해 자원을 독식한다. 조직 내에서도 뛰어난 개인 성과를 내지만 동료를 깎아내리고 정보를 독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조직의 관점에서 암세포와 같다.
건강한 조직문화는 이런 암세포형 인재가 발붙이지 못하도록 '아포토시스(Apoptosis, 세포 자살)'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 건강한 유기체는 손상된 세포가 전체에 해를 끼칠 것 같으면 세포 스스로 사멸하는 경로를 택한다. 실패한 프로젝트를 명예롭게 종료하고, 잘못된 의사결정을 인정하며 물러날 줄 아는 '쿨한 실패'의 문화는 생물학적 생존 전략인 아포토시스와 닮아 있다.
저자는 환자의 상태가 호전되다 다시 악화되는 과정을 보며 "죽음은 직선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조직의 성장 또한 마찬가지다. 분기 실적이 꺾였다고 해서, 프로젝트가 한 번 실패했다고 해서 그것이 곧 종말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전체 시스템이 돌아가고 있는가'이다. 세포 하나가 없어져도 유기체는 살 수 있지만, 시스템이 붕괴하면 모든 세포가 죽는다. 리더와 구성원은 각자의 위치에서 맡은 기능을 수행하되, 전체 시스템의 항상성을 유지하기 위해 서로 신호를 주고받아야 한다.
고장 난 부품을 갈아 끼우는 방식(세포독성항암제)으로는 현대 비즈니스 환경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리더와 조직문화 담당자는 '기계공'의 마인드를 버리고, '정원사' 혹은 '생태계 관리자'가 되어야 한다. 세포들이 서로의 신호를 오해하지 않도록 '면역 관문'을 열어주고, 자양분이 골고루 퍼지게 하며, 독성 물질이 고이지 않도록 흐름을 만드는 일. 그것이 김범석 교수가 임종을 앞둔 환자들에게서 배운, 그리고 우리가 조직에서 실천해야 할 '공생의 기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