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프리카의 초원. 얼룩말이 사자에게 쫓기고 있다. 얼룩말은 죽기살기로 달린다. 심장은 빠르게 뛰고, 온 몸의 근육에는 에너지가 몰리며, 몸 전체가 하나의 명령만을 따른다. 살아남아라.
포유류는 전체 에너지의 10~20퍼센트를 소화에 소비하는데, 스트레스를 받으면 소화는 빠르게 정지된다. 침이 마르고 입속이 건조해진다. 위의 움직임이 멈추고 효소나 위산 분비가 중단된다. 소장은 연동운동을 중단하고 아무것도 흡수하지 않는다. 위나 장으로 가는 혈류가 감소해서 혈액 속에 들어 있는 산소와 포도당이 이를 필요로 하는 다른 곳으로 공급된다. 스트레스가 발생하면 부교감 신경계는 활동을 중지하고 교감 신경계가 활동을 개시하여 소화는 뒤로 미루어진다. 바로 사자에 쫓기는 얼룩말의 경우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사자의 공격을 피하게 되면 얼룩말은 다시 평화롭게 풀을 뜯는다. 위협이 끝나면 몸도 비상상태를 해제한다. 하지만 인간은 사자(위협)가 사라진 뒤에도 계속 걱정하며 도망을 다닌다. 실제 위협보다 머리속에서 만들어 낸 가상의 위협이 인간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것이다. 내일 있을 중요한 PT, 상사의 굳은 표정, 조직개편 소문, 아이의 성적, 부모님의 건강, 파란색 주식 거래창 등. 우리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미리 걱정하고, 이미 지나간 일을 다시 불러와 괴로와한다. 얼룩말은 사자에게 쫓기지만, 인간은 자신의 기억과 상상에 쫓긴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인간은 생존을 위해 모든 자원을 재배치한다. 이 반응으로 인해 인류는 지금까지 살아남았다. 스트레스 반응은 짧게 켜졌다 꺼지면 우리를 살린다. 하지만 오래 켜져 있으면 문제가 된다. 비상벨은 화재가 났을 때 신속 진화를 위해 필요하지만, 하루 종일 비상벨이 울린다면 불이 아니라 소음에 미쳐 죽을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스트레스를 병으로 바꾸는가. 이 책의 저자 로버트 새폴스키는 사건의 크기보다 사건을 경험하는 방식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같은 압박도 어떤 사람에게는 견딜 만한 도전이 되고, 어떤 사람에게는 대처하기 힘든 위협이 된다. 그 차이를 가르는 중요한 요소가 통제감이다.
사람은 고통 자체보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느낌에 더 크게 무너진다. 비행기가 자동차보다 통계적으로 안전해도 비행기를 더 무서워하는 사람이 많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자동차 안에서는 내 손과 발로 방향과 속도를 통제한다고 느끼지만, 비행기 안에서는 모든 것을 남에게 맡겨야 한다. 객관적 위험보다 주관적 통제감이 스트레스의 강도를 좌우한다.
예측 가능성도 중요하다. 언제 나쁜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있으면, 적어도 나머지 시간에는 긴장을 내려놓을 수 있다. 그러나 언제 울릴지 모르는 상사의 카톡 메시지, 기준을 알 수 없는 평가, 차마 말은 못하지만 불편한 관계, 방향이 자주 바뀌는 조직은 사람을 계속 대기 상태로 만든다. 예측할 수 없는 세계에서는 몸도 마음도 계속 경계 태세를 유지할 수 밖에 없다.
여기에 사회적 지원이 추가된다. 좋은 관계는 생물학적 완충 장치다. 누군가에게 말할 수 있고, 누군가가 내 편이 되어주며, 누군가가 상황을 함께 해석해 줄 때 스트레스는 줄어든다. 고리타분한 표현이지만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고립은 스트레스를 키우고, 연결은 스트레스를 낮춘다.
이 책에서 특히 기억에 남는 대목은 임상적으로 우울한 사람들이 상담사와 첫 예약을 하기만 해도 현저한 향상을 보인다는 이야기다. 아직 상담을 받은 것도 아니고 약을 먹은 것도 아니다. 우울증을 유발했던 삶의 문제가 해결된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좋아진다. 왜 그럴까. 아마도 예약이라는 작은 행동이 무력감에 균열을 내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이 상태에 그대로 머물지 않겠다.”
“도움을 청해도 된다.”
“이 문제는 다룰 수 있다.”
“적어도 다음 한 걸음은 정해졌다.”
즉, 스스로 진심으로 바뀌길 원하고 노력하려는 단순한 행동만으로도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스트레스 관리의 출발점은 나를 압도하는 스트레스를 다룰 수 있는 형태로 바꾸는 것이다. 무엇이 나를 가장 불안하게 하는가. 그중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지금 정할 수 있는 다음 행동은 무엇인가. 누구에게 말할 수 있는가. 어떤 정보를 알면 덜 불안해지는가.
스트레스는 안개처럼 밀려올 때 가장 무섭다. 그러나 질문을 던지면 안개는 조금씩 걷히고 형상이 드러난다. 구체화되면 다룰 수 있다. 고통을 나누면 견딜만 하다. 작은 행동으로 옮길 수 있다면 더 이상 무력감에 시달리지 않는다.
물론 새폴스키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를 주장하는 관념론자가 아니다. 모든 것이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책의 미덕은 균형감에 있다. 상황에 대한 우리의 해석은 중요하다. 영원토록 성경을 공부하는 곳이 천국이 될 수도 있고, 반대로 영원토록 성경을 공부하는 곳이 지옥같은 상황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어느 정도 선까지다. 모든 고통을 개인의 태도 문제로 돌리는 것은 위험하다. 모든 결과를 노력으로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 것도 위험하다.
세상에는 개인의 노력만으로 넘기 어려운 조건이 있다. 그런데도 모든 문제를 “내가 더 열심히 했어야 했다”로 해석하면, 노력은 미덕이 아니라 형벌이 된다. 통제할 수 없는 것까지 통제하려 드는 순간, 사람은 더 빨리 소진되기 쉽다.
스트레스에 잘 대처하려면 가장 스트레스가 심한 상황에 처하더라도 나아질 것이라는 생각을 가져야 하며, 나아지지 않을 가능성을 부정하지는 말아야 한다. 이 두가지 상반되는 경향 사이에서 주의 깊게 균형을 잡아야 한다. 신학자인 라인홀트 니부어(Karl Paul Reinhold Niebuhr)의 평온을 비는 기도문(Serenity Prayer)처럼,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꾸는 용기와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평온함, 그리고 그 둘을 구별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스트레스》를 읽고 나면 몸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다. 잠이 안 오고, 소화가 안 되고, 단 것이 당기고, 가슴이 답답하고, 기억력이 흐려지는 것을 개인의 의지 부족으로만 보면 안된다. 이는 너무 오래 비상근무 중인 몸이 보내는 경고 신호일 수 있다.
얼룩말은 사자가 사라지면 다시 여유롭게 풀을 뜯는다. 인간은 사자가 사라져도 걱정을 멈추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또 다른 능력이 있다. 자신의 스트레스를 이해할 수 있고, 도움을 청할 수 있으며, 해석을 바꿀 수 있고, 작은 행동을 시작할 수 있다.
사자가 없는데도 계속 걱정하며 달리고 있다면, 이제 물어볼 시간이다. 나는 정말 도망치는 중인가, 아니면 오래전에 끝난 추격전을 아직도 몸속에서 반복하고 있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