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RBP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저는 그 단어의 뒷부분이 참 좋았습니다.
파트너..
사람을 관리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업을 함께 밀고 가는 사람이라는 뜻이니까요.
그런데 이 일을 좀 하고 나서야 그 단어가 비워둔 질문 하나를 보게 됐습니다.
누구의 파트너인가요?
큰 회사라면 이 질문은 어렵지 않습니다.
파트너는 사업부장이고, 사업부장 위에는 또 누군가가 있고, 그 위에는 임원이 있습니다.
한 사람의 판단이 조직 전체를 흔들기 전에 걸리는 턱이 여러개입니다.
그런데 중소기업은 다릅니다.
파트너는 대부분 대표 한사람이고, 대표 위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중소기업에서 오너리스크라는 말은 뉴스에 나오는 그런 사건을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매일 생기는 작은 일들을 가리킵니다.
지난주에 승인한 채용 계획이 이번 주 회의에서 없던 일이 됩니다.
같은 지각인데 어떤 직원은 경고를 받고 어떤 직원은 농담으로 넘어갑니다.
아침에 기분이 좋지 않았던 대표가 오후에 팀장 한 명을 불러 그만두게 하는게 좋겠다고 말합니다.
연봉 인상률이 인사팀 책상을 거쳐 보고서로 보고받고
의사결정을 통해 정해지는게 아니라 대표의 그날 기억이나 감정 속에서 정해집니다.
이런 일들은 하나하나 보면 사건이 아닙니다.
어느 회사에나 있는 일이라고 넘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구성원은 사건이 아니라 패턴을 봅니다.
기준이 사람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 결정이 번복될 수 있다는 것과
그래서 회사의 말을 믿고 계획을 세우면 손해를 본다는 것.
구성원이 이 패턴을 한번 배우고 나면 그다음부터 회사가 하는 모든 말은 깍여보이게 됩니다.
오너리스크의 실제 비용은 대표가 내린 어떤 결정 하나가 아니라
그 결정들이 쌓여서 회사의 말이 싸지는 것입니다.
이런 회사에서 인사담당자는 대개 두 자리 중 하나에 서게 됩니다.
하나는 통역사의 자리입니다.
대표가 저사람 마음에 안 든다고 하면 그걸 역량 미달로 인한 수습 종료로 바꿔 씁니다.
대표가 이번에 인상은 없다고 하면 그걸 경영 환경을 고려한 동결로 바꿔 씁니다.
대표의 말을 제도의 언어로 번역하는 일입니다.
이 자리에 서면 회사는 겉으로는 제도가 있는 회사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구성원은 압니다.
제도가 결정을 만든 게 아니라 결정이 먼저 있고 제도가 뒤따라왔다는 것을.
통역사는 리스크를 줄이지 않습니다. 리스크에 서류를 입힐 뿐입니다.
다른 하나는 방패의 자리입니다.
대표의 결정이 구성원에게 닿기 전에 인사담당자가 중간에서 막아섭니다.
대표를 설득하고, 시간을 끌고, 결정을 흐리고, 안되면 구성원 앞에서 대신 사과합니다.
이 자리는 통역사보다 양심에는 편합니다.
하지만 이것도 리스크를 줄이지 못합니다.
리스크를 인사담당자 한사람의 몸으로 옮깁니다.
그 사람이 지치거나 떠나면 막고 있던 모든 것이 한꺼번에 쏟아집니다.
두 자리의 공통점은 둘다 리스크를 옮기기만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는 서류로, 하나는 사람으로.
어느 쪽도 리스크가 생기는 지점을 건드리지 않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세번째 자리는 덜 극적인 것 같습니다.
대표가 결정을 내리기 전에 기준이 먼저 말하게 만드는 일입니다.
대표가 어떤 직원의 수습 종료를 말하기 전에
수습 기간에 무엇을 보고 무엇을 기록하고 몇 주 차에 누가 피드백하는지가 이미 정해져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대표가 저 사람 마음에 안 든다고 했을 때 인사담당자가 할말은
안됩니다가 아니라 자료들을 보시겠습니까가 됩니다.
자료들이 대표의 감각과 같으면 종료는 정당해지고
다르면 대표는 자기 감각을 한 번 더 들여다볼 기회를 얻습니다.
기준은 대표를 막는 장치가 아니라 대표가 자기 결정에 근거를 갖게 해주는 장치입니다.
이 순서가 중요합니다.
결정이 내려진 뒤에 기준을 만들면 그기준은 그결정을 정당화하려고 만들어진 것으로 읽힙니다.
결정이 내려지기 전에 기준이 있으면 대표가 기준을 따르든 어기든
조직은 최소한 무엇이 어겨졌는지를 압니다.
오너리스크가 가장 커지는 회사는 대표가 기준을 어기는 회사가 아니라 어길 기준조차 없는 회사입니다.
두번째로 하는 일은 결정의 흔적을 남기는 것입니다.
누가 언제 무엇을 근거로 결정했는지를 적어두는 일입니다.
이일은 대표에게 설명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기록이라는 말을 들으면 많은 대표가 자기를 겨냥한 증거 수집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일을 다른 말로 설명합니다.
기록은 대표를 보호하는 것이라고.
번복된 결정은 기록이 없으면 변덕이지만 기록이 있으면 상황 변화에 따른 수정이 됩니다.
사람에 따라 달랐던 처분은 기록이 없으면 편애지만
기록이 있으면 적어도 그 차이의 이유를 설명할수 있습니다.
기록이 없는 대표는 자기 결정을 설명할 수단이 자기 기억뿐이고,
분쟁이 생겼을 때 기억은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합니다.
대표가 이 말을 받아들이면 기록은 감시가 아니라 습관이 됩니다.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것 자체가 인사담당자가 알아야 할 정보입니다.
세번째는 대표에게 사실을 말하는 자리를 미리 정해두는 것입니다.
사건이 터진 뒤에 찾아가서 말하면 그 말은 항의가 됩니다.
매달 같은 요일에 같은 자료를 들고 가서 말하면 그 말은 보고가 됩니다.
내용이 같아도 자리가 다르면 듣는 쪽의 자세가 다릅니다.
이 자리에서 인사담당자가 가져가는 것은 의견이 아니라 숫자와 장면입니다.
올해 들어 번복된 결정이 몇 건이었는지.
또 퇴사 면담에서 같은 말이 몇번 나왔는지.
대표가 직접 지시한 인사 조치 중 사후에 문제가 된것이 무엇이었는지.
대표는 자기 결정의 패턴을 스스로 볼 기회가 거의 없습니다.
매번 하나의 결정만 보기 때문입니다.
그 결정들을 한장에 모아서 보여주는 사람이 조직에 한명은 있어야 하고
그 자리는 반드시 인사담당자의 것이어야 합니다.
여기까지 하고도 바뀌지 않는 대표가 있습니다.
기준을 만들면 기준을 없애고, 기록을 남기면 기록을 불편해하고, 보고 자리를 만들면 자리를 미룹니다.
그때 인사담당자는 한 가지 질문을 자기에게 해야 합니다.
내가 지금 하는 일이 리스크를 줄이고 있는가?
아니면 리스크가 밖에서 보이지 않게 해주고 있는가?
제도의 언어로 쓴 문서가 쌓여갈수록 회사는 더 정상적으로 보입니다.
그 문서를 쓰는 사람이 인사담당자입니다.
어느 순간부터 그 문서는 조력이 아니라 공범의 흔적이 됩니다.
그 선이 어디인지는 누구도 대신 그어주지 않습니다.
다만 그 선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
그리고 선을 넘기 전에 떠날 수 있다는것을 아는 것까지가 오너리스크에 대한 대처에 포함된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리스크를 안에서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것도 하나의 리스크입니다.
HRBP라는 단어가 비워둔 질문으로 돌아옵니다.
중소기업에서 대표와 회사는 거의 같은 말처럼 쓰입니다.
그래서 대표의 파트너가 되는 것과 회사의 파트너가 되는 것이 같은 일처럼 보입니다.
대부분의 날에는 실제로 같습니다.
하지만 오너리스크가 생기는 날은 그 둘이 갈라지는 날입니다.
대표가 원하는 것과 회사에 필요한 것이 다른 날.
그날 인사담당자가 어느 쪽에 서는지가 그 사람이 누구의 파트너인지를 정합니다.
나는 비즈니스 파트너는 대표인가요? 아니면 회사인가요?
평소에는 답하지 않아도 되는 질문입니다만,
답해야 하는 날이 오기 전에 한번쯤은 생각해두어야 하는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최근 어떤 계기를 통해서 이번에 느끼게 되어 이글을 쓰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