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원에서 제가 붙들고 있던 주제는 비전 기반 자율주행의 횡방향 제어였습니다. 쉽게 말하면 카메라로 차선을 인식해서 핸들을 얼마나 꺾을지 계산하는 일입니다. 그 무렵 국내 어느 연구실에서는 실제 차량에 장비를 싣고 고속도로를 달리는 시험까지 하고 있었습니다. 1995년, 비 오는 날 경부고속도로에서 시속 100km 자율주행에 성공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저는 그때 생애 첫 차를 몰고 다녔습니다.
처음 가보는 지역을 가야할 경우, 도로 지도책을 조수석에 펴 놓고, 신호 대기 중에 몇 페이지인지 확인하고, 그러다 길을 잘못 들면 갓길에 차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지나가는 사람에게 물어야 했습니다. 대학 연구실에서는 차가 스스로 고속도로를 달리는 실험을 하고 있는데, 실제 운전을 하는 저는 종이 지도를 펴고 있었던 겁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운전은 확실히 달라졌습니다. 내비게이션이 길을 알려주기 시작했고, 실시간 교통정보가 붙었고, 하이패스가 톨게이트를 없앴고, 차가 위험을 먼저 경고하게 됐고, 이제는 고속도로에서 반자율주행(스마트 크루즈 컨트롤)을 켤 수 있습니다. (심지어, 테슬라 차량의 경우는 도심지에서도 주차장 등 일부 구간을 제외하고는 완전자율주행이 가능합니다)
그런데, 과거 30년을 되짚어 보면, 지도책에서 지금의 자율주행의 시대로 진화되는 각 과정 속에서 허들을 넘을 수 있게 한 게 “기술”만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내비게이션이 쓸모 있으려면 정확한 지도 데이터가 필요했습니다. 실시간 교통정보가 가능하려면 도로 곳곳에 센서가 깔리고 통신망이 있어야 했습니다. 자율주행차가 도로에 나오려면 사고가 났을 때 누가 책임지는지 정하는 법이 있어야 했습니다.
기술은 1995년에 이미 어느 정도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정작 필요했던 건 디지털 지도, 도로, 법, 그리고 사람들의 습관이었습니다.
AI 사용 현황을 묻는 회의에 몇 번 들어가 봤습니다. 대개 이런 숫자가 나옵니다. 도입한 솔루션(도구)이 몇 개인지, AI도구로 만들어진 에이전트가 몇 개인지, 월 사용률이 몇 퍼센트인지, 토큰 사용량은 어떤지 등.
이런 숫자들은 정확합니다. 다만 아무것도 설명해 주지 않습니다. 전사에 챗봇을 만들고, 사용률이 70%가 나와도 일하는 방식은 하나도 안 바뀐 경우를 저는 여러 번 봤습니다. 반대로 툴은 하나뿐인데 업무 흐름 자체가 달라진 팀도 있었습니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이미 매일 하고 있는 판단이 있지 않나. 사람에게 일을 맡길 때의 판단 말입니다. 신입사원에게 일을 줄 때는 잘게 쪼갭니다. 상세히 지시하고, 중간에 확인하고, 결과를 하나하나 봅니다. 3년차쯤 되면 완결된 업무 한 건을 통째로 맡깁니다. 만드는 과정은 안 보고 결과물을 검토합니다. 10년 이상의 숙련된 실무자에게는 업무 영역 하나를 통으로 넘깁니다. 진행 중에는 예외 상황만 보고받습니다. 팀장에게는 “이 목표를 달성하라”만 주고 방법은 묻지 않습니다. 성과로만 확인합니다. 임원에게는 목표뿐 아니라 일하는 방식 자체를 바꿀 권한까지 줍니다.
같은 사람인데 뭐가 달라진 걸까요. 능력이겠죠. 그런데 겉으로 드러나는 건 능력이 아닙니다. 맡기는 일의 크기와 내가 들여다보는 횟수입니다. AI도 딱 이 곡선을 따라갑니다. 처음에는 신입에게 맡기듯 씁니다. 초안을 시키고 전부 고쳐 씁니다. 그러다 점점 결과물을 검토만 하게 되고, 어느 시점부터는 과정을 안 보게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 회사 AI 수준이 어디쯤인가”를 물을 때 던져야 할 질문은 “어느 사이즈의 일을, 얼마나 적은 감독으로 AI에 맡길 수 있는가(위임할 수 있는가?)” 입니다. 툴이 몇 개인지, 에이전트가 몇 개인지, 토큰 사용량이 얼마인지가 아니라요.
여기까지 정리하고 나서도 문제가 남았습니다. “일의 크기”나 “감독의 양”이라는 게 말은 그럴듯한데 손에 안 잡힙니다. 회의에서 누군가는 “우리는 이미 잘 쓰고 있다”고 하고 누군가는 “아직 멀었다”고 하는데, 둘 다 근거를 대기 어렵습니다. 그러다 다시 운전이 떠올랐습니다. 운전에는 논쟁이 필요 없는 기준이 하나 있거든요. “손과 발을 자동차의 핸들(과 페달) 에서 뗄 수 있는가, 없는가.(운전을 자동차에게 얼마나 위임할 수 있는가)”. 그러고 보니, 운전이 실제로 진화해 온 과정은 지금 회사에서 벌어지는 AX로 인한 업무의 진화 단계와 꽤 정확하게 겹칩니다.

내비게이션이 처음 나왔을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길을 몰라도 갈 수 있게 됐지만 핸들과 페달은 여전히 100% 운전자인 저의 몫이었습니다. 내비가 우회전하라고 해도 실제로 도는 건 저였고, 그 길이 막혀 있으면 무시하는 것도 저였습니다. 내비게이션은 알려줄 뿐, 운전하지 않습니다.
하이패스는 성격이 달랐습니다. 차를 세우고, 창문을 내리고, 카드를 건네고, 영수증을 받던 그 일련의 과정이 통째로 사라졌습니다. 하나의 완결된 작업이 없어진 겁니다. 사람은 이제 그 일에 대해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반자율주행에서는 또 달라집니다. 차가 스스로 차선을 유지하고 앞차와 간격을 맞춥니다. 가감속을 차가 하니까 페달에서 발을 뗍니다. 그런데 손은 핸들 위에 있어야 합니다. 몇 초만 떼도 경고음이 울리고, 공사 구간이 나오면 즉시 넘겨받아야 합니다. (사람이 상시로 관리, 감독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여기서 “발은 뗐지만 손은 못 뗐다”는 상태가 생깁니다. 회사 업무에도 이 상태가 있습니다. AI가 실행은 하는데 사람이 계속 지켜봐야 하는 구간이요. 제 경험으로는 대부분의 조직이 지금 여기 어딘가에 있습니다.
내용이 길어져서 다음 편에 이이서 진행하겠습니다. 다음 편에서는 이 기준을 조금 더 만져 보려고 합니다. “손을 뗄 수 있는가”를 업무에 옮기면 정확히 무엇을 봐야 하는지, 그리고 회의에서 단계 이야기가 나올 때 쓸 수 있는 세 단어를 정리해 보겠습니다.
한 가지 미리 말씀드리면, 저도 이 프레임을 만들면서 아직 답을 못 찾은 부분이 있습니다. 특히 뒤쪽 편에서 다룰 신입 육성 문제가 그렇습니다. 실행을 AI가 가져가면 사람은 어디서 배우나 하는 문제인데, 솔직히 지금도 정리가 안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