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녕하세요, SK 아카데미 권석균 Research Fellow입니다. 주요 기업들의 AI 내재화 접근에 이어 이번에는 ‘영어 공용화’에 대한 제 생각을 공유드립니다. 2월 초 삼성그룹은 해외법인과 국내법인간 문서는 영어만 사용하는 것을 시작으로 영어 공용화 확산을 선언했는데요, 저도 해당 주제에 대한 사례 연구를 완료한 참이었습니다. 그래서 준비 중이던 스킬 기반 조직/HR(Skill based HR/Org.)은 잠시 접고 이 주제로 갈아탔습니다. 미리 말씀드리자면 이 글은 영어 공용화가 좋다, 나쁘다를 따지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왜 영어 공용화가 경영진 사이에서 다시 거론되고 있는지, 그리고 도입 여부를 결정할 때 고려해야 할 사항들은 무엇인지에 대해서만 간략하게 정리해봅니다.
사실 국내 기업들은 영어 공용화에 대한 실패 경험이 있습니다. 2000년대 중·후반 그룹사들을 중심으로 외국인 임원 영입, 영어 회의/보고 붐이 일었죠. 당시 회사 생활을 하셨던 분들께서는 기억나실 겁니다. 일단 회의들이 빨리 끝났습니다. 아이디어는 많지만 영어는 불편한 분들이 입을 닫았기 때문이죠. 그러다 보니 회의가 끝난 다음, 우리말로 하는 이른바 그림자 미팅(Shadow Meeting)이 바로 이어졌습니다. 같은 자리에 계셨던 외국인 임원들은 그들 나름대로 불편함을 호소하셨죠. 업무 생산성도 급격하게 떨어집니다. 30분이면 될 일에 몇 배의 시간이 더 들어갑니다. 평가 공정성은 또 어땠나요? 일 잘하는 사람보다 영어 잘 하는 사람이 각광받는다는 인식이 커집니다. 결국 얼마가지 않아 영어 공용화는 없던 일이 되었죠.
이렇게 크게 데었는데도 왜 또 이 이야기가 나오는 걸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우선 내수 시장의 한계입니다. 국내에서 만든 제품/서비스를 수출하든, 해외에서 ‘무’에서 ‘유’를 만들든 글로벌 사업은 필수가 되고 있습니다. 또다른 요인은 인재 부족입니다. 출산율이 감소하는 상황에서 인재를 찾는 범위를 국내로 한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죠. 그런데 두 가지 이유 모두 언어 장벽이 큰 걸림돌입니다. 현지에서 사업 파트너를 찾을 때도 영어가 필요합니다. 외국인 인재들이 본사에서 일을 할 때도 영어가 통용되면 편하죠. 이것이 영어 공용화가 다시 부상하는 배경입니다.
저는 연구를 통해 대표적 사례인 일본의 라쿠텐(Rakuten), 대만의 TSMC 등을 들여다볼 수 있었는데요, 이들이 말하는 영어 공용화의 진의와 도입 여부에 대한 조언을 정리해보았습니다.
목표는 ‘영어 실력 향상’이 아니라 ‘일하는 방식의 선진화’!
언어학에서는 링구아 프랑카(Lingua Franca)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모국어가 다른 사람들끼리 원활한 의사소통을 위해 공통의 언어를 지정한다는 라틴어인데요. 영어 공용화는 이 단어의 앞에 Biz. English가 붙어, ‘BELF’라는 용어로 통용됩니다. 즉 기업에서 쓰는 BELF란 회사 내 언어를 Biz. English로 통일하는 정책인 것이죠. 여기에서 기억하실 것은 두 가지, ‘Biz. English의 개념’과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먼저 Biz. English란 문법적 정확성이나 유창한 발음이 아니라 단지 일이 되는데 필요한 수준(Getting Jobs Done)의 영어를 의미합니다. 영어를 모국어로 쓰지 않는 사람들끼리 서로 뜻만 통할 수 있는 수준이면 충분하다는 것이죠.
영어 공용화를 통한 궁극적 목표는 일하는 방식의 선진화입니다. 언어 학자들에 따르면 영어에는 존대말이 없다는 점과 능동형 위주라는 장점이 있습니다. ‘나는 어떻게 생각한다, 나는 뭘 할 것이다’가 다른 언어들에 비해 명확하다는 것이죠. 영어 공용화 기업들은 ‘영어를 쓰다보면 이러한 장점이 일하는 방식에도 투영될 것이다, 그래서 커뮤니케이션 누수는 줄고 업무 스피드는 높아질 것이다’라는 기대가 있습니다.
이것만 보면 도입하는 것이 맞을 것 같지만, 당연히 짚어봐야 할 점들도 많은데요. 그 중에서도 세 가지 포인트만 말씀드립니다.
핵심 고려사항 1. 사업 모델은 얼마나 글로벌라이제이션(Globalization)을 요구하는가?
모든 변화는 불편합니다. 특히 영어를 모국어로 쓰지 않는 기업들에게 영어 공용화가 초래하는 불편은 예상을 넘죠. 그렇기 때문에 구성원들에게 불편을 감수해야만 하는 당위성을 납득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가장 좋은 논리는 ‘회사의 사업 모델이 글로벌라이제이션을 필요로 한다’가 아닐까요? 현재 해외 매출 비중이 어느 정도 되는지, 영어권 국가들이 주요 시장인지, 해외 출신 인재들이 얼마나 필요한지 등에 대한 팩트 제시가 중요합니다. 이때 미래 관점도 가미되어야 하겠죠. 지금 당장은 이들 모습이 미미하더라도 중장기적으로는 해외 시장 공략이 필수라든지, 업계 전반적으로도 해외 현지 기업에 대한 인수/통합이 주요 전략이라든지 등에 대한 검토도 필요합니다.
핵심 고려사항 2. 구성원들의 실력과 수용성은 어느 정도인가?
사업 모델의 요구는 일종의 ‘당위성’입니다만, 이것만으로 밀어붙이기는 어렵습니다. 당위성과 현실성간 균형이 필요한데요, 여기서 말하는 현실성이란 두 가지입니다.
우선 구성원들의 영어 수준입니다. 기본적인 Biz. English가 가능한 사람들이 얼마나 있는지에 대한 파악이 필요합니다. TOEIC Speaking이든, OPIc 등급이든 혹은 또 다른 기준이든 나름의 분석이 선행되어야 하죠. 여기에 더해서 구성원들의 영어 실력을 높이는데 투자할 예산이 있는지도 무시하지 못할 현실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직무 특성입니다. 회사에는 여러 가지 직무와 조직이 있죠. 이들간 영어를 필요로 하는 정도에 얼마나 차이가 있는지, 아니면 균일한지도 고려해야 합니다.
핵심 고려사항 3. 경영진은 불편을 감내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위에서 말씀드린 두 가지 사항에 따라 영어 공용화 도입 범위와 HR 연계 수준을 결정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점이 있는데요, 바로 경영진의 준비도이죠.
영어 공용화 추진으로 가장 불편을 경험하는 계층은 어디일까요? 바로 경영진입니다. 아래에서 정보가 잘 올라오지 않고 본인의 관점도 제시하기 어려우니 의사결정이 뻑뻑해집니다. 그래서 영어 공용화 기업들은 경영진들이 통역없이 30분 이상 영어로 전략 토론이 가능한지, 구성원들의 도움없이 영어 문서를 검토/작성할 수 있는지 냉정하게 판단해야 한다고 제안합니다. 더불어 영어 사용으로 인해 구성원에게 리더로서의 카리스마가 떨어질 수 있다는 우려를 감내할 수 있는지도 짚어볼 사항으로 제안하는데요. 이 부분이 쉐도우 미팅을 초래한 주요 원인이었기 때문이죠. 기업들은 고려사항 1, 2가 아무리 충족된다 하더라도 경영진의 준비도가 낮다면 우선 경영진부터 영어 공용화를 도입한 다음 확산하라고 조언합니다.
이상으로 최근 영어 공용화가 다시 거론되는 배경과 도입 여부를 결정하는데 있어서의 고려사항을 말씀드렸습니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하게 따져봐야 할 근본적인 관점 하나를 첨언드립니다.
대부분의 기업들은 영어의 중요성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영어 공용화와는 반대로 접근하는 곳들도 있는데요. 대표적으로 국내 유통계의 거물인 C사는 모든 팀에 동시 통역사를 배정합니다. 구성원들에게 영어 공부를 시키는 비용, 익숙치 않은 영어 회의/보고에서 오는 비효율을 감내하느니 전문가에 의존하는 것이 더 낫다는 판단이죠. 또 어떤 기업은 AI로 풉니다. 구성원들은 각자 자기 나라의 말을 하고 AI 에이전트가 통역/번역해주는 것이죠.
이들과 비교할 때 영어 공용화 추진 기업들의 결정적 차이는 언어 결정론에 대한 믿음에 있습니다. 언어 결정론에서는 사람들이 직접 하는 말이 특정한 사고까지 이끈다고 보는데요, 기업으로 치환해보면 구성원들이 직접 영어를 쓰면 글로벌 사업에 필요한 인지 구조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보는 것이죠.
이 관점에 동의하시나요? 독자분께서는 어느 방향을 선택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