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즘 주말 한강에 나가보면, 형광 조끼를 맞춰 입은 러닝 크루들을 어렵지 않게 마주친다. 몇 년 전만 해도 낯설었던 풍경이 이제는 일상이 됐다. 피곤한 주말 새벽,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는데 사람들은 왜 스스로 모여 땀을 흘리는 걸까.
자기결정성 이론(SDT)은 이렇게 설명한다. 사람이 어떤 행동을 스스로 지속하려면 세 가지 심리 욕구가 충족되어야 한다고. 내가 선택했다는 느낌인 자율성, 내가 나아지고 있다는 느낌인 유능감, 혼자가 아니라는 느낌인 관계성. 러닝은 이 세 가지를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채워주는 활동이다. 언제 뛸지 내가 정하고, 5km를 완주하며 성장을 눈으로 확인하고, 크루 단톡방에서 서로의 기록을 응원한다. 러닝 열풍은 그래서 단순한 유행이 아니다. 일상에서 좀처럼 누리기 어려운 ‘내 결정으로 사는 시간’을 되찾으려는 움직임에 가깝다.
그렇다면, 우리가 설계하는 교육은, 구성원에게 그런 경험을 주고 있을까?
커리큘럼 안에는 분명 ‘자율성’이라는 단어가 있다.
선택형 과정, 자기주도학습, 학습자 중심 설계.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선택지는 대부분 우리가 미리 그려둔 그림 안에 있다. 구성원이 고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우리가 의도한 방향으로 자연스럽게 흘러가도록 설계된 구조일 때가 많다.
몇 번의 인터뷰와 설문 결과를 보며 “우리 구성원은 이런 학습을 원한다”고 확신했던 순간들도 있었다. 나 역시 그랬다. 열 명 남짓의 인터뷰 결과를 슬라이드에 정리하며, 마치 전체 구성원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것처럼 보고했던 기억이 있다. 돌이켜보면 그 수치는 구성원의 목소리라기보다, 우리가 이미 만들고 싶었던 프로그램을 정당화하는 근거에 가까웠는지도 모른다. 그 수치가 정말 구성원의 목소리를 담고 있었는지, 아니면 우리가 듣고 싶었던 답을 확인하는 방향으로 해석된 건 아닌지 ? 이따금 되묻게 된다.
더 넓게 보면, 이건 개인의 문제라기보다 우리가 놓인 환경의 문제이기도 하다. 변화가 빠를수록 유연함이 중요하다는 말은 이제 누구나 한다. 그런데 실제 교육 현장에서는 여전히 작년의 방식을 반복하고, 선배의 방법을 따르는 것이 더 안전하게 느껴진다. 새로운 시도가 실패했을 때의 부담이 크고, 조직의 분위기가 실험보다 안정을 요구할 때도 있다. 그 안에서 우리도 어느새 익숙한 틀을 만들고, 그 틀 안에서 학습자를 바라보게 되는지 모른다.
그렇다면 이 세 가지 욕구를 교육 안에서 실제로 적용시킨 사례는 없을까.
Spotify의 사례가 하나의 힌트가 된다. Spotify는 ‘스쿼드(Squad)’라는 소규모 자율팀 단위로 운영되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흥미로운 건 이 구조가 업무 방식에만 머물지 않고, 학습과 역량 개발에도 그대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각 스쿼드는 자신들에게 필요한 역량이 무엇인지 스스로 정의하고, 그에 맞는 학습 방식을 직접 설계한다. 중앙에서 커리큘럼을 내려보내는 대신, 현장에 있는 사람들이 “우리에게 지금 무엇이 필요한가”를 묻고 답하는 구조다.
이런 방식이 단순히 구성원의 만족도를 높이는 데 그치지 않는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학습이 현업과 직접 연결되고, 구성원 스스로 역량 개발의 방향을 결정할 때 실질적인 성과로 이어진다는 것. 이는 교육에 투자하는 이유를 설명할 때 경영진과 상사를 설득하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물론 이 방식이 모든 조직에 그대로 적용될 수는 없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원리 ‘학습의 주도권을 현장에 돌려주는 것 ‘는 충분히 참고할 만하다.
이러한 원리를 우리 현장, 교육에 작게 이식해본다면 어떤 방법들이 있을까?
첫째, 학습 목표를 함께 정하는 자리를 만드는 것이다. 교육 담당자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주제를 일방적으로 제시하는 대신, 팀 단위로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역량이 무엇인가”를 먼저 묻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역량, Skill 도출 워크숍 등으로 이미 진행하고 있다. 다만 구성원이 선택인지, 우리의 기획을 뒷받침하는 자료를 만들기 위해인지, 그 목적이 다를 뿐) 설문이 아니라 대화로, 수치가 아니라 맥락으로. 이 과정 자체가 구성원에게는 자율성의 경험이 되고, 리더에게는 교육 방향을 현업과 연결하는 명분이 된다.
둘째, 짧고 현업에 연결되는 실천 단위로 쪼개는 것이다. 긴 과정 하나보다, 배운 것을 현업에서 하나만 적용해보고 2주 후에 팀원과 나누는 구조가 유능감과 관계성을 동시에 살린다. 러닝 크루가 매주 기록을 공유하며 서로를 밀어주는 방식과 다르지 않다.
셋째, 학습의 결과를 스스로 정의하게 하는 것이다. 수료 여부나 점수 대신, "이 학습을 통해 내가 실제로 달라진 점은 무엇인가”를 짧게 써보게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아니면 요즘 트렌드인 생성형 AI를 통해 변화된 모습을 이미지로 만들어보게 할 수도 있다. 작지만, 학습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다시 확인하는 장치가 되고, 조직 입장에서는 교육의 실질적 변화를 가시화하는 데이터가 되기도 한다.
자율성, 유능감, 관계성. 새벽 한강의 러닝 크루는 이미 이 세 가지를 자연스럽게 실천하고 있다. 대단한 시스템이 없어도, 누가 설계해주지 않아도. 어쩌면 우리 교육에 필요한 건 더 정교한 커리큘럼이 아니라, 구성원 스스로 선택하고 움직일 수 있는 작은 여백일지 모른다. 그리고 그 여백을 만들어주는 것, 어쩌면 그게 우리의 진짜 역할일 수 있다. 그 여백이 생길 때, 사람들은 아무도 시키지 않아도 새벽에 운동화 끈을 묶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