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올림픽] '수영 황제' 펠프스, NBC 수영 해설위원으로 변신 - 파이낸셜뉴스](https://image.fnnews.com/resource/media/image/2021/07/20/202107200940155944_l.jpg)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마이클 펠프스는 출전한 8개 종목에서 모두 금메달을 따며 단일 올림픽 최다 금메달 기록을 세웠다. 이후 올림픽 통산 28개의 메달을 획득하며 역사상 가장 많은 메달을 보유한 올림피언이 됐다. 하지만 그가 훗날 꺼내놓은 이야기는 화려한 기록과는 사뭇 달랐다. 펠프스는 2008년 올림픽이 끝난 뒤 두 번째 ‘포스트 올림픽 우울감’을 경험했다고 말했다. 평생의 목표를 달성한 뒤, 이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없는 공백이 찾아왔다는 것이다.
호주의 수영 영웅 이안 소프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그는 수영을 자신의 '안전망(safety blanket)'이라고 표현했다. 자신을 지탱해준 존재였지만, 동시에 다른 삶을 준비하지 못하게 만든 울타리이기도 했다고. 은퇴를 결심한 순간 가장 먼저 찾아온 감정은 해방감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경험은 몇몇 특별한 선수들만의 예외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평생 하나의 역할에 깊이 몰입했던 사람일수록, 그 역할이 끝난 뒤 마주하는 공백은 거대할 수밖에 없다.
오랫동안 스포츠계에는 '최고가 되려면 운동에만 올인해야 한다'는 믿음이 확고했다. 학업은 경기력을 방해하는 요소로, 운동 외의 활동은 집중력이 부족하다는 신호로 여겨졌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전국대회와 합숙훈련이 이어지는 동안 수업은 자연스럽게 후순위로 밀렸고, ‘공부하는 선수’보다 ‘시합에서 이기는 선수’를 길러내는 데 집중했다.
문제는 경기장을 떠난 이후다. 운동선수의 커리어는 생각보다 훨씬 짧다. 상당수는 20~30대에 선수 생활을 마치고, 부상이 발생하면 그 시기는 예고 없이 앞당겨지기도 한다. 선수로 사는 시간보다 '선수 이후의 삶'이 훨씬 긴데도, 다수는 그 시간을 준비하지 못한 채 갑자기 사회로 던져진다. 개인이 준비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만 말하기는 어렵다. 운동 이외의 가능성을 탐색할 시간과 기회를 충분히 제공하지 않았던 구조의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에 스포츠계는 ‘이중경력(Dual Career)’을 중요한 정책이자 연구 과제로 다루기 시작했다. 지속적으로 경기력을 향상시키는 것과 선수 이후의 삶을 준비하는 것은 반드시 충돌하는 목표가 아니라는 인식의 전환이었다.
운동과 학업을 병행하면 경기력이 떨어질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두 영역에 시간과 에너지를 나누어 사용해야 하니, 운동에만 집중하는 선수보다 불리할 것이라는 논리다. 그러나 이중경력 연구들이 실제로 내놓는 결과들은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한다.
유럽스포츠심리학회(FEPSAC)는 2024년 발표한 이중경력 관련 포지션 스테이트먼트에서, 지난 10여 년간의 유럽 이중경력 연구를 종합해 일곱 가지 명제를 제시했다. 이 문헌에 따르면 학생 선수가 학업을 병행한다고 해서 경기력이 저하된다는 근거는 확인되지 않았다.
오히려 교육의 유연성, 경기 일정 조정, 지도자와 학교의 협력 같은 적절한 환경이 뒷받침될 때, 선수들은 운동과 학업을 안정적으로 병행하며 ‘경기 중 느끼는 심리적 부담까지 줄일 수’ 있었다.
즉, 적절한 지원이 없는 병행은 부담이 될 수 있지만 운동과 학업을 병행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된다면 현재의 선수 생활과 미래 선수 이후의 삶에 대한 준비는 충분히 양립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핵심은 학업과 운동 중 하나를 선택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선수의 몰입을 방해한 것은 '학업' 그 자체가 아니라, 두 영역을 병행할 수 없게 만드는 '환경의 부재'이기 때문이다.
이중경력의 본질은 두 가지 일을 무조건 동시에 하는 데 있지 않다. 현재의 역할과 정체성이 한 사람의 삶 전체가 되지 않도록, 그 역할을 수행하는 동안 다음 역할에 필요한 역량도 함께 만들어가는 것에 가깝다.
이 관점에서 보면 운동선수의 삶과 직장인의 삶은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지 않는 것 같다. 차이가 있다면, 운동선수에게는 은퇴라는 비교적 분명한 전환점이 있다는 것. 반면 직장인에게는 부서 이동, 직무 전환, 조직개편, 신기술 도입, 이직과 퇴사처럼 더 다양하고 불분명한 모습의 전환점이 있다. 전환의 형태와 시점은 다르지만 두 사람이 마주하는 질문은 크게 다르지 않다. ‘나는 지금의 역할이 끝난 뒤에, 무엇을 할 수 있는 사람인가.’
선수에게는 선수 이후의 삶이 있다. 직장인에게도 지금의 직무와 소속된 조직 이후의 삶이 있다. 그렇다면 직장인의 이중경력은 무엇일까. 직장인의 이중경력이라고 하면 먼저 사이드잡을 떠올릴 수 있다. 그러나 이 글에서 말하는 이중경력은 소득원을 하나 더 만드는 일과는 조금 다르다. 엄밀히 말해 스포츠 분야의 ‘이중경력’을 직장인에게 그대로 옮길 순 없겠지만, 스포츠의 이중경력 관점을 직장생활에 적용한다면,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 있다. ‘현재 맡은 업무를 수행하면서도 언젠가 맞이할 다음 역할과 삶을 준비하는 역량과 경험을 함께 축적하는 것’
즉, 새로운 기술을 배우는 것. 부서 밖의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것. 학습을 통해 새로운 전문성을 쌓는 것과 같이 현재의 직무와 직접 연결되지 않더라도, 앞으로의 커리어 전환에 활용할 수 있는 관계와 경험을 만들어가는 것이 직장인의 이중경력이다. 즉 ‘현재의 경력과 다음 경력을 동시에 준비하는 것’에 가깝다.
조직심리학에서도 이러한 관점을 뒷받침하는 근거를 찾을 수 있다. Strauss, Griffin과 Parker(2012)는 사람들이 미래에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이 되고 싶은지 보여주는 ‘미래 업무 자기상(future work self)’을 연구했다. 연구 결과, 자신이 바라는 미래의 업무적 모습이 분명하고 구체적인 사람일수록 경력계획과 역량개발 등 자신의 미래를 만들어가기 위한 주도적 경력행동을 더 많이 보였다.
미래를 그리는 것이 현재를 버리게 만드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미래의 모습은 지금 무엇을 배우고, 누구를 만나고, 어떤 경험을 쌓아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나침반 역할을 했다.
그런데 현실의 많은 조직은 그 반대로 움직이는 경우가 많다. 새로운 기술을 배우고 싶다는 직원에게 ‘지금은 중요한 프로젝트가 먼저이다’, 대학원 진학을 고민하는 직원에게 ‘대학원은 승진하고 가도 늦지 않는다’, 다른 부서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싶다는 직원에게 ‘본업부터 잘하길’ 바란다.
조직 입장에서 보면, 구성원에게 현재의 성과와 집중을 요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그리고 실제로 단기적으로는 이런 '본업에만 집중하는 것'이 임팩트 있는 성과를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본업에만 집중하라는 메시지가 반복되면, 구성원은 현재의 역할에만 집중하는 것이 조직이 원하는 유일한 모습이라고 학습한다. 기획자는 기획만, 개발자는 개발만 하는 사람, 영업은 영업만 하는 사람으로 고착되는 것이다.
구성원과 조직 모두, 그 다음을 준비하는 활동이 자연스럽게 뒤로 밀려난다. 단기적인 효율과 성과를 얻는 대신, 개인과 조직의 장기적인 전환 역량, 즉 새로운 역할과 환경에 대응하는 능력을 약화시키는 셈이다.
반대로 이중경력을 지원하는 시간, 즉 ‘미래를 준비하는 시간’을 공식적인 업무 안에 포함한 회사도 있다.
유니레버는 2018년부터 AI 기반 사내 인재 마켓플레이스 ‘FLEX Experiences'를 운영하고 있다. 직원들은 본업을 유지하면서 다른 팀 프로젝트에 일부 시간을 투입해 새로운 기술과 경험을 쌓을 수 있다. 코로나19로 사업 수요가 급변했을 때, 유니레버는 이 플랫폼을 통해 8천명이 넘는 직원과 30만 시간의 인력을 수요가 줄어든 부서에서 늘어난 부서로 재배치했다. 그 결과 전사 생산성은 41% 늘었고, 부서 간 협업 시간은 20% 증가했다.
구성원이 그 다음을 준비하는 시간을 '본업에서 훔쳐가는 시간', ‘다른 일에 한눈파는 시간’이 아닌 조직의 공식적인 업무 구조 안에 넣어두면, 그 혜택은 구성원에게만 가지 않는다. 구성원이 미래를 준비하는 시간이 곧, 조직이 미래를 대비하는 시간이 되는 것이다.
한 전직 국가대표 출신 해설위원은 이런 말을 남겼다. ‘운동선수는 은퇴하는 순간 스스로를 가장 작게 만드는 경우가 많습니다’. 실력이 떨어져서가 아니다. 운동선수라는 하나의 역할과 정체성으로만 살아온 사람이 그 역할을 잃는 순간, 자신을 설명할 다른 언어가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직장인도 다르지 않다. 조직개편, 권고사직, 갑작스러운 부서변경 등 전환기는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그리고 그 순간 사람을 가장 작게 만드는 것은 ‘단 하나의 직무로만 자신을 정의해온 삶’일 것이다. 내가 하던 일, 내가 속한 회사와 부서를 빼고 나면 ‘나라는 사람을 설명할 언어’가 사라져 버려선 안된다.
이중경력의 역할은 현재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데 있지 않다. 선수가 운동선수로서의 자신을 유지하면서도 학생, 직업인, 시민으로서의 정체성을 함께 발달시키는 것처럼, 직장인도 현재의 전문성을 유지하면서 새로운 기술과 역할, 관계와 가능성을 함께 만들어갈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하나의 역할이 끝나더라도 자신 전체가 함께 무너지지 않는다.
스포츠에서의 이중경력 연구가 주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1. 미래를 준비하는 것은 현재의 몰입을 방해하지 않는다.
2. 오히려 미래를 준비할 수 있는 환경이 현재의 몰입을 더 오래 지속하게 만든다.그리고 이 메시지들은 비단 운동선수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직장인에게 지금의 업무 외에 다음의 역할과 미래의 삶을 준비할 수 있게 돕는 환경은, 구성원과 조직 모두의 '변화에 대응하는 능력'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된다.
선수에게도 직장인에게도, 지금의 커리어뿐 아니라 그 이후의 삶도 준비되고 있다는 안심과 자신감이 결국 현재의 성과를 끌어올린다. 그렇기에 HR과 리더십이 던져야 할 질문도 바뀌어야 한다. '구성원의 몰입을 어떻게 높일 것인가'가 아니라, '구성원이 미래를 준비하면서도 현재의 책임에 몰입할 수 있는 환경을 어떻게 설계할 것인가'로 말이다.
지금의 역할에만 몰입하게 만드는 조직과, 현재에 몰입하면서도 다음 역할까지 준비하게 만드는 조직. 그 차이가 5년, 10년 뒤 조직과 개인의 생존을 가르는 결정적 전환 역량이 될 것이다.
The Other Game은 스포츠 씬 속 리더십과 마인드셋을 연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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