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R에서 일을 하다 보니 경영진의 하루를 가까이서 지켜볼 기회가 많이 있습니다. 30분 단위로 회의가 끊이지 않고, 그 틈새마다 무게가 다른 결정들이 밀려듭니다. 흥미로운 것은, 정작 경영진들이 가장 아끼려 하는 자원이 ‘시간’이 아니라 최적의 의사결정을 내리는 '판단력' 그 자체라는 점이었습니다.
뇌과학은 이 직관을 뒷받침합니다. 인간이 무언가를 선택할 때 뇌는 상당한 에너지를 소모하고, 하루 동안 너무 많은 선택과 결정을 내린 뒤 뇌의 인지 에너지가 고갈되어, 이후 중요한 판단이나 결정을 내리는 능력이 크게 떨어집니다. 이른바 '결정 피로(decision fatigue)'입니다.

스티브 잡스가 늘 같은 디자인의 옷을 입고, 마크 저커버그가 회색 티셔츠를 고집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옷 고르는 데 뇌를 쓰지 않겠다는 것이지요. 덜 중요한 결정에서 아낀 에너지를, 정말 중요한 결정에 쏟기 위한 전략입니다. 이들이 진짜 원하는 것은 '더 많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결정하지 않아도 되는 영역을 늘리는 것'입니다.
AI는 이 지점에서 강력한 비서가 되어줍니다. 다만 그 쓸모는 계층에 따라 결이 다릅니다.
실무자에게 AI는 속도입니다. 보고서 초안, 데이터 정리, 반복 업무의 시간을 극적으로 줄여줍니다. 그러나 경영진은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그들의 머릿속은 언제나 다른 질문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 직원 한 사람의 한 시간이 만들어내는 부가가치는 얼마인가?
생산 금액 대비 투입 인건비의 생산성은 나아지고 있는가, 나빠지고 있는가?
단위 시간당 생산량은 현장별로 어떻게 다른가?
여기에 더해 요즘 리더들은 숫자 너머의 신호에도 예민합니다.
이 출장은 정말 필요한 것인가, 아니면 피로와 안전 리스크만 키우는가.
일이 한 사람에게만 몰려 번아웃이 쌓이고 있지는 않은가.
그러다 불만이 곪아 핵심 인재를 놓치는 일이야말로, 리더가 가장 안타까워하는 순간입니다.
세계적인 기술 조사기관인 Gartner가 최근 발표한 <2026년 기술 도입 로드맵> 은 이 변화를 정확히 짚습니다. 불과 1년 전만 해도 기업이 기술에서 기대하는 최고의 가치는 '속도와 민첩성'이었습니다. 그런데 올해, 그 중심축이 '직원 생산성'과 '인간-AI 협업'으로 옮겨갔습니다.
즉, "얼마나 빨리 하느냐"에서 "사람의 시간을 얼마나 가치 있게 쓰느냐"로 질문이 바뀐 것입니다. 이 미묘한 이동이 시사하는 바는 큽니다. 기술은 더 이상 '자동화 도구'가 아니라, 사람의 판단을 돕는 파트너로 재정의되고 있다는 뜻이니까요.
같은 보고서는 또 하나의 뼈아픈 진실도 전합니다. 많은 조직이 AI 도구를 이미 도입했지만, 그 효과를 제대로 측정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도입은 유행처럼 빨랐으나, "그래서 무엇이 좋아졌는가"에 답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저는 HR의 데이터가 던질 수 있는 가능성을 봅니다.
그동안 대부분의 조직에서 인사 관리는 대개 '월말 마감 보고'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지난달은 어땠는지, 무엇이 문제였는지를 사후에 들여다보는 방식입니다. 리스크는 이미 터진 뒤에야 인지됩니다.
그러나 사람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통합하고, AI가 이상 징후와 원인, 그리고 예측까지 자동으로 짚어준다면 어떨까요. 핵심 인재의 이탈 조짐을 떠나기 전에 감지하고, 특정 부서에 일이 과도하게 몰리는 번아웃 신호를 미리 읽고, 물량과 무관하게 초과근무가 늘어나는 비효율을 조기에 잡아낼 수 있습니다.
이때 HR 데이터는 '보고를 위한 숫자'를 넘어 경영 의사결정과 성과로 연결되는 언어가 됩니다. 리더는 매번 처음부터 판단하지 않아도 됩니다. AI가 먼저 신호를 걸러 "여기를 보십시오"라고 짚어주면, 리더는 아껴둔 에너지를 정말 중요한 결정에 집중하면 되는 것입니다.
똑같은 옷을 입던 CEO들이 아끼려 한 것은 시간이 아니라 판단력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조직이 AI와 데이터에 기대해야 할 것도 '더 많은 자동화'가 아니라, 리더와 구성원의 유한한 판단 에너지를 가장 가치 있는 곳에 쓰도록 돕는 일입니다.
기술이 아무리 빨라져도, 마지막 결정은 결국 사람의 몫입니다. 그렇다면 좋은 도구의 역할은 분명합니다.
사람이 덜 중요한 결정에 지치지 않도록, 그리고 정말 중요한 순간에 가장 맑은 정신으로 판단할 수 있도록 곁을 지키는 것. 그것이 제가 생각하는, AI 시대의 진짜 '비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