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것도 좀 맡아줄 수 있죠?
이 말을 들어본 적 있으신가요? 아마 있으실 겁니다
그리고 아마 그 자리에서 알겠다고 답하셨을 겁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직무가 늘어나는 순간은 대개 이렇게 조용합니다
발령이 나지도 않고 조직도가 바뀌지도 않습니다
회의가 끝나갈 무렵 지나가듯 던져지는 한 문장이면 충분합니다
그 한 문장 뒤에 일은 진짜로 늘어납니다
회의가 하나 늘고 챙겨야 할 사람이 늘고 밤에 생각나는 걱정거리가 늘어납니다
다만 그 일이 늘어났다는 사실은 어디에도 적히지 않습니다.
조직은 말을 기억하지 않습니다 문서만 기억합니다
이건 조직이 야박해서가 아닙니다 조직이 원래 그렇게 생겼기 때문입니다
조직은 사람이 아니라 서류로 굴러갑니다
서류에 없는 일은 조직 입장에서 일어나지 않은 일입니다
그래서 이런 일이 생깁니다
평가 시즌이 오면 평가 항목에는 원래 제 일만 들어 있습니다.
새로 맡은 일은 항목에 없습니다 그 일을 아무리 잘해도 평가지에는 쓸 칸이 없습니다
못하면 티가 나는데 잘하면 티가 안 납니다
인수인계를 할 때가 되면 더 분명해집니다 인수인계서에는 제가 맡은 일이 적혀 있습니다
적혀 있지 않은 일은 인계되지 않습니다
후임은 그 일이 있는 줄도 모르고 몇 달 뒤에 사고로 알게 됩니다
조직개편을 하면 그 일은 어느 부서 밑에도 들어가지 않습니다
문서상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그리고 얼마 뒤에 또 누군가가 회의 끝 무렵에 그 말을 듣게 됩니다.
여기까지는 그래도 이해가 됩니다 정말 이상한 건 그다음입니다
시간이 좀 지나면 그 일이 원래 제 일이었던 것처럼 보입니다
남들에게만 그렇게 보이는 게 아닙니다 저에게도 그렇게 보입니다
언제부터 이걸 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고 어쩌다 맡게 됐는지도 흐려집니다
그냥 원래 하던 일 같습니다 조직이 제 일을 지운 게 아니라 제가 스스로 지운 셈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되면 이제는 말을 꺼낼 수도 없습니다
원래 하던 일에 대해서는 아무 할 말이 없으니까요.
이 대목에서 좀 재밌습니다 제 일이 그겁니다
누가 무슨 일을 하는지 정리하고 문서로 만드는 것
직무기술서를 쓰고 조직도를 그리고 역할이 바뀌면 바뀐 대로 고쳐두는 것
저는 조직의 기억을 관리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제 직무기술서는 몇 년째 그대로입니다
남의 일은 문서로 만들면서 제 일은 말로 받았습니다
회사가 기록해주지 않아서가 아니라 제가 기록하지 않아서 입니다
이상하게 제 얘기를 문서에 적는 건 어색했습니다
뭔가 요구하는 사람처럼 보일까 봐 그랬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기록은 요구가 아닙니다 기록은 그냥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적어두는 겁니다
요구는 그 다음 문제이고 안 해도 그만입니다
적어두지 않으면 요구할지 말지 고민할 기회조차 생기지 않습니다.
저는 다음 주에 제 직무기술서를 열어보려고 합니다
거기 없는 일들을 적어둘 생각입니다 누구에게 보여주려는 건 아닙니다
제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저부터 알아야 할 것 같아서입니다
적어둔다고 당장 달라지는 건 아마 없을 겁니다
다만 적어두지 않으면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직무기술서에는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다 들어 있으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