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을 읽었다면, 이제 설계할 차례다
지난 글에서 구조는 디지털인데 문화는 아날로그인 구조-문화 불일치를 짚었고, 조직을 읽을 수 있어야 조직을 설계할 수 있다는 조직 리터러시를 이야기했다. 이제 설계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이다.
많은 기업이 조직개발을 프로그램으로 이해한다. 워크숍을 열고, 퍼실리테이션을 하고, 조직문화 행사를 기획한다. 그러나 프로그램은 조직개발의 수단이지 조직개발 그 자체가 아니다. 조직은 시스템이고 시스템의 구성요소는 사람이다. 그래서 조직개발은 그 시스템을 어떻게 설계해야 되는가를 말한다.
조직개발의 세 얼굴 — 진단형, 대화형, 시스템형
조직개발에는 오래된 2분류가 있다. 부셰와 마샥은 OD 실천이 두 갈래로 갈라졌다고 보고 이를 진단형(Diagnostic OD)과 대화형(Dialogic OD)으로 이름 붙였다(Bushe & Marshak, 2009).
진단형은 조직을 측정 가능한 실체로 본다. 데이터를 모아 문제를 찾고 처방한다. 조직진단, 서베이, 갭 분석이 여기에 속한다. 대화형은 조직을 사람들의 언어와 이야기가 만들어낸 구성물로 본다. 긍정탐구(Appreciative Inquiry), 퓨처서치, 오픈스페이스가 대표적이다. 대화의 내용이 바뀌면 조직이 바뀐다고 본다. 나는 여기에 세 번째로 시스템형을 더하여 말하고자 한다.

흥미로운 것은 부셰와 마샥 자신이 대화형 OD에는 시스템 이론에 준하는 이론적 토대가 없다는 점을 인정했다는 사실이다. 시스템형은 바로 그 빈자리를 향한다.
진단형은 증상을 찾아내고, 대화형은 에너지를 만들어낸다. 그런데 진단도 하고 대화도 했는데 몇 개월 뒤 같은 문제가 돌아오는 경험을 해보지 않았는가, 구조가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증상을 찾고 에너지를 만들어도, 그 에너지가 흘러갈 길이 설계되어 있지 않으면 조직은 원래 자리로 돌아간다.
설계한다는 것은 시스템을 말한다
설계라는 말을 들으면 흔히 조직도를 떠올린다. 상자를 그리고 선을 잇는 일은 설계의 결과물 중 아주 작은 일부다. 설계란 어떤 결과가 반복적으로 만들어지도록 조건을 배치하는 일이다. 한 번 잘 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 그렇게 되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설계의 대상은 사건이 아니라 시스템이다. 좋은 CEO는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이 아니라 문제가 반복되지 않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사람이라고 지난 글에서 썼다. 그 시스템이 바로 설계의 대상이다.
조직은 시스템이다. 이것은 비유가 아니라 정의다. 공동의 목적이 있고, 부분들이 상호연결되어 있으며, 서로 상호작용하고, 외부와 주고받는 열린 경계를 가진 네 조건을 갖춘 것을 우리는 시스템이라 부른다. 조직은 이 조건을 모두 충족한다.
시스템의 구성요소는 사람이다
그런데 이 시스템의 구성요소가 무엇인지는 자주 잊혀진다. 제도도 프로세스도 아니다. 사람이다. 사람은 저마다 목적과 가치를 추구한다. 각자의 목표를 가지고 있고, 자기 나름의 일하는 방식이 있으며, 스스로 의사결정하고 판단한다. 자율적이고 주도적인 존재다. 여기서 조직과 사람이 겹친다. 조직도 목적과 가치를 추구한다. 미션과 비전과 핵심가치(MVC)가 그것이다. 조직도 목표를 가지는데 전략목표가 그것이다. 사람과 조직은 같은 맥락으로 움직인다.
그렇다면 조직은 생산성을 높이는 개개인의 합일까? 그렇지 않다. 복잡계에서 부분의 합은 전체가 되지 않는다. 전체를 만드는 것은 부분들 사이의 관계다. 같은 사람 열 명을 모아놓아도, 그들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조직이 된다. 그래서 설계의 대상은 사람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다. 조직개발이 사람을 바꾸는 일이 아니라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HR의 책임은 지식노동자의 생산성이다
그렇다면 HR의 역할과 책임은 무엇인가? 한 문장으로 말하면 지식노동자의 생산성을 높이는 일이다. 이 명제는 피터 드러커가 20세기 경영의 가장 큰 공헌이 육체노동자의 생산성을 50배 높인 것이었다면, 21세기 경영이 해야 할 일은 지식노동자의 생산성을 높이는 것이라고 말한 데서 온다. 드러커가 이 말을 한 지 사반세기가 지났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 이 질문에 제대로 답하지 못한 것 같다. 답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지식노동자가 무엇인지, 그들의 생산성이 무엇인지를 건너뛰었기 때문이다.
지식노동자는 자기 일에 대해 그 누구보다 많이 알고 아는 것에 그치지 않고 영향력을 주는 사람이다. 그래서 무엇을 할지 지시받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과업을 정의한다. 드러커가 지식노동자 생산성의 첫 번째 조건으로 "과업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든 이유다. 자율성은 복지가 아니라 생산성의 전제조건이다.
AI 시대에 이 성격은 더 강해졌다. 보고서를 쓰고 데이터를 분석하는 일은 이미 상당 부분 넘어갔다. 남은 것은 무엇을 물을지 정하고, 나온 답을 맥락 속에서 판단하는 일이다. 지시받을 수 없는 일만 남는다.
그렇다면 생산성이란 무엇인가
육체노동의 생산성은 양으로 잴 수 있었다. 시간당 몇 개를 만들었는가. 지식노동은 그렇지 않다. 보고서를 두 배 많이 썼다고 생산성이 두 배가 되지는 않는다. 나는 지식노동자의 생산성을 세 가지로 본다.
첫째는 영향력이다. 한 사람이 가진 지식은 그 사람 안에 머무는 한 조직의 자산이 아니다. 공유되고 전파되어 다른 사람의 일을 바꿀 때 비로소 생산성이 된다. 혼자 뛰어난 전문가 한 명보다, 자기가 아는 것을 옆자리에 흘려보내는 사람 열 명이 조직을 더 멀리 데려간다.
둘째는 적응이다. 지식은 유통기한이 있다. 3년 전의 성공방식이 오늘도 통할 것이라 믿는 순간 생산성은 마이너스가 된다. 변화에 적응하며 자기 지식을 계속 갱신하는 능력, 그것이 지식노동자의 생산성이다.
셋째는 창발이다. 주어진 문제를 푸는 것이 아니라, 아무도 묻지 않은 질문을 던지고 없던 조합을 만들어내는 일. 복잡계에서 새로운 질서는 위에서 설계되는 것이 아니라 상호작용에서 솟아오른다. AI가 기존 답을 평준화할수록, 조직이 사람에게 기대하는 것은 이 세 번째로 옮겨간다.
문제는 이 셋 중 어느 것도 개인의 결심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지식을 나누면 손해 보는 조직에서 누가 지식을 나누겠는가. 틀린 말을 하면 책임을 지는 조직에서 누가 아무도 묻지 않은 질문을 하겠는가.
생산성은 개인의 역량이 아니라 조직의 조건이다. 그래서 설계가 필요하다.
학습하는 조직, 그리고 판을 짜는 네 가지 조건
영향력과 적응과 창발이 저절로 일어나는 조직을 우리는 학습하는 조직이라 부른다. 피터 센게가 이 이름을 붙인 지 30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대부분의 기업에서 학습은 교육팀의 연간 계획표에 머물러 있다.
학습하는 조직은 교육과정의 총합이 아니다. 네 가지 조건이 갖춰진 판이다.
심리적 안전감. 틀린 말을 해도 바보 취급당하지 않고, 실패한 시도가 책임이 아니라 학습으로 기록되는 환경이다. 에이미 에드먼슨의 연구가 보여준 것은 역설적이다. 심리적으로 안전한 팀일수록 실수 보고 건수가 더 많았다. 실수를 덜 해서가 아니라, 숨기지 않아서다. AI 활용을 숨기는 조직에서 AI 학습이 일어날 리 없다.
동기부여. 지식노동은 외재적 동기로 끌어낼 수 없다. 더 많이 공유하라고 지시할 수는 있어도, 가장 중요한 노하우를 꺼내게 할 수는 없다. 의미와 자율성, 그리고 성장의 실감이 움직이는 힘이다.
비전정렬. 개인의 목표와 조직의 전략목표가 서로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내가 지금 하는 일이 조직의 어디에 닿는지 모르는 사람은 지식을 축적할 이유가 없다. 정렬은 선포가 아니라 번역의 문제다. 조직의 언어를 개인의 언어로 옮겨주는 사람이 중간 리더다.
프로젝트 기회부여. 학습은 강의실이 아니라 일에서 일어난다. 새로운 과제, 낯선 사람들과의 협업, 책임이 따르는 결정. 이런 기회가 소수에게만 돌아가는 조직에서는 소수만 학습한다. 기회의 분배가 곧 학습의 분배다.
이 넷은 교육 프로그램이 아니라 제도와 관행이다. 평가가 실패를 처벌하면 심리적 안전감은 생기지 않는다. 보상이 개인 성과만 보면 지식은 공유되지 않는다. 그래서 이것은 HRD의 일이면서 동시에 HRM의 일이다. 구조와 문화를 함께 건드리지 않으면 어느 쪽도 움직이지 않는다.
암묵지가 드러나는 자리를 만드는 일, 그것이 판이다
조직에서 가장 중요한 지식은 문서에 없다. 20년 차 담당자가 거래처 목소리만 듣고도 상황을 짐작하는 감각, 회의 분위기를 읽고 안건을 미루는 판단, 어떤 자료는 믿고 어떤 자료는 다시 확인해야 하는지에 대한 직감. 이런 것들이 암묵지다.
노나카 이쿠지로는 지식창조가 암묵지를 서로 나누고(공동화), 그것을 말로 꺼내고(표출화), 다른 지식과 결합하고(연결화), 다시 몸에 익히는(내면화) 순환에서 일어난다고 설명했다. 핵심은 암묵지가 추출의 대상이 아니라는 점이다. 짜낼 수 없고 다만 드러나게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질문이 바뀐다. 어떻게 지식을 모을 것인가가 아니라, 어떤 자리에서 사람들이 자기도 모르게 그것을 꺼내게 되는가? 함께 일하면서 어깨 너머로 보게 되는 자리, 실패한 시도를 먼저 말하는 리더가 있는 자리, 다른 부서 사람과 한 과제를 붙들고 씨름하는 자리, 새 아이디어에 누가 어떻게 기여했는지가 드러나는 자리,
이 자리들을 만드는 것, 개개인이 자기 암묵지를 자연스럽게 꺼내고 나누며 새로운 기회와 아이디어에 각자의 방식으로 기여하도록 조건을 배치하는 것이 판을 짜는 일이다.
조직개발은 사람을 바꾸는 일이 아니다. 사람이 이미 가진 것이 드러나고 흐르고 쌓이도록 판을 짜는 일이다. 그리고 그 설계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다. 조직이 스스로 학습하게 만드는 것.
조직을 읽을 수 있어야 설계할 수 있다. 그리고 설계할 수 있어야 조직은 비로소 스스로 자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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