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몇년 째 전국 중소기업을 다니면서 평가, 보상, 노무, AI 등 다양한 영역의 컨설팅을 하고 있다. 이 중에 경영진에게 인기가 좋고 결과 보고시에 반응이 좋은 영역은 직무분류체계를 설계 해주는 일이다. 그리고 컨설팅 결과를 구성원들에게 발표할 때도 흥미롭게 보는 지점도 이 부분이다. 왜 유독 이 지점에서 사업주와 구성원 모두 높은 관심을 보일까?
2. 사업주는 관리를 하고 싶어 한다. 누가 무슨 일을 하고 얼마나 잘하고 있고 그래서 얼마를 줘야 하는지 통제하고 싶어 한다. 반면 구성원은 성장을 하고 싶어 한다. 지금 이 일을 하면서 내가 무엇을 배우고 있고 그래서 다음엔 어디로 갈 수 있는지 알고 싶어 한다. 이 둘은 서로 다른 것을 원하는 게 아니라 각자의 언어로 같은 것, 즉 '내가 지금 어디에 있고 어디로 가는가'를 묻고 있을 뿐이다. 문제는 이 둘 사이를 이어줄 다리가 없다는 것이다.
3. 그 다리가 바로 직무관리 영역이라고 본다. 직무가 정리되어 있지 않으면 사업주의 관리 욕구도 구성원의 성장 욕구도 각자 허공에서 맴돈다. 이 간극을 메우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중소기업 인력 운영과 유지의 핵심 병목이라고 본다. 대기업은 이 간극을 다른 방식으로 메울수 있다. 굳이 직무 하나하나를 세심하게 설계해주지 않아도 중소기업에 비해 경제적 보상이 높고 복리후생 환경이 잘 갖춰져 있으며 높은 사회적 인정 등 구성원이 머물 이유는 이미 충분하다.
4. 중소기업은 임금, 복리후생, 사회적 인정 등 대기업을 쉽게 따라잡기가 어렵다. 그래서 많은 중소기업이 인력 유지를 포기하다시피 하거나 혹은 따라할 수 없는 것을 따라하려다 지친다. 요즘 눈에 많이 띄는게 하나 있다. 인사 담당자들이 모여있는 그룹에서 종종 올라오는 질문이 그것이다. "중소기업 다니다 대기업으로 이직하기 쉬운가요?". 중소기업이 생존하고 인력을 지키기 위한 길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성장의 발판'이다. 여기서 무엇을 배우고 어떤 역량을 쌓으면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는지를 명확히 보여주는 것은 규모의 문제가 아니라 설계의 문제이기 때문에 중소기업도 충분히 해낼 수 있는 영역이다.
"왜 다들 시키는 일만 하냐"
5. 사업주와 구성원이 부딪히는 장면은 늘 비슷하다. 사업주는 "왜 다들 시키는 일만 하냐"고 답답해하고 구성원은 "중소기업은 체계가 없다"고 불평한다. 겉보기엔 서로를 탓하는 말 같지만 사실 둘 다 같은 결핍을 다른 각도에서 가리키고 있다. 사업주가 원하는 관리는 '누가 무엇을 책임지는가'가 정해져야 가능하고 구성원이 원하는 성장은 '지금 여기서 다음이 어디인가'가 보여야 가능하다. 이 둘의 공통 전제가 바로 직무라고 생각한다.
6. 이 간극은 회사가 작을 때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인원이 대여섯 명일 때는 대표가 시키면 다 같이 하고 누가 뭘 맡았는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대표는 구성원의 대부분을 다 알고 있다. 문제는 회사가 성장해서 인원이 약 30명을 넘어가는 순간부터다. 이때부터는 관리와 성장, 이 두 욕구가 동시에 터지는데 이를 받쳐줄 직무 구조는 여전히 창업 초기 그대로다. 신규 입사자는 자신의 업무 범위를 알 수 없어 헤매다 떠나고 기존 인력은 계속 늘어나는 업무를 떠안으며 소진되어 떠난다.
7. 그래서 나는 이 간극이 실패한 기업의 증상이 아니라 성장하는 기업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관문이라고 본다. 지금 이 문제로 골머리를 앓는 회사는 역설적으로 다음 단계로 넘어갈 준비가 된 회사일 가능성이 높다. 다만 관리와 성장을 동시에 담아낼 직무관리 구조가 없을 뿐이다.
"여기서 몇 년 일하면, 제가 뭘 할 수 있게 되나요."
8. 이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중소기업은 거의 없다고 생각한다. 급여 테이블은 있어도 성장 경로는 없다. 몇 년 차가 되면 얼마를 받는지는 말해줄 수 있어도 몇 년 차가 되면 어떤 역량을 갖추고 어떤 직무로 이동할 수 있는지는 아무도 답하지 못한다. 청년들이 중소기업을 떠나 대기업으로 혹은 이직 자체를 반복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고 본다.
9. 그런데 이 지점이야말로 중소기업에게 기회이기도 하다. 임금과 복지, 사회적 시선으로는 중소기업이 대기업을 이길 수 없다. 하지만 '내가 여기서 무엇을 배우고 어디로 갈 수 있는지'를 명확히 보여주는 일은 규모가 아니라 설계의 문제다. 대기업의 촘촘한 직무 사다리를 중소기업이 그대로 흉내 낼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지금 하는 일이 다음 무엇으로 이어지는지 정도는 중소기업도 얼마든지 설계할 수 있다. 직무가 정리되지 않은 조직에서는 이 답을 줄 방법이 아예 없다는 것이 문제일 뿐이다.
인건비와 숙련도 혹은 노동생산성은 비례해서 올라가나요?
10.여기서 한 가지 짚어야 할 안타까운 현실이 있다. 우리나라 기업의 대부분의 임금체계는 여전히 연공, 호봉 중심이다. 근속연수가 쌓일수록 인건비는 매년 자동으로 오르고 고연차 직원이 많다는 건 그만큼 인건비 부담이 크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 인건비 상승분만큼 노동생산성도 함께 오르고 있느냐고 물으면 명확히 그렇다고 답하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애초에 부가가치, 숙련도, 직무 같은 단어 자체가 현장에서는 아직 낯설기 때문이다. 임금은 해가 바뀌면 자동으로 오르는데 그 임금에 걸맞은 역량과 성과가 쌓이고 있는지를 가늠할 언어와 도구가 없는 것이다.
11.이런 구조에서는 중소기업 입장에서 근속연수가 늘어난다고 해서 그 구성원이 항상 더 큰 이익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라는 계산이 나올 수밖에 없다. 중소기업에게 필요한 건 붙잡아두는 힘이 아니라 각 단계에서 사람이 무엇을 배우고 어디로 이동하는지를 보여주는 설계다. 중소기업 인력난의 실체는 '사람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자리가 설계되지 않은 것'이라고 보는 시각이 중요하다 생각한다.
12.여기까지의 진단을 바탕으로 정책적 제언을 해본다면 중소기업 인력난 대책은 채용 지원금이나 복지 인프라 확충만으로는 근본적으로 풀리지 않을 것이다. 대기업을 좇는 보상 경쟁은 중소기업에게 애초에 승산이 없는 싸움이기 때문이다. 대신 채용 이후에 사람이 남아있게 만드는 구조, 즉 직무 중심의 관리체계가 정책의 중심에 들어와야 한다.
13.문제는 이 체계를 중소기업이 스스로 설계할 여력이 없다는 데 있다. 경영진이 본업을 하면서 인사 업무까지 떠안는 구조에서 직무를 정리하는 일은 늘 우선순위 밖으로 밀린다. 그렇다고 실무자는 인사 뿐만 아니라 재무, 회계, 총무, 구매 등 다양한 업무를 수행하는 바 이를 설계할 여유가 없다. 그래서 이건 개별 기업의 의지 문제가 아니라 구조적 공백이고 구조적 공백은 정책이 메워야 하는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14.다행히 이 공백을 메울 수 있는 표준 도구는 이미 존재한다. 국가직무능력표준(NCS)을 활용하면 중소기업이 백지에서 직무 구조를 설계할 필요 없이 검증된 표준을 자사에 맞게 적용하는 방식으로 접근할 수 있다. 다만 이 표준을 이해하는 것과 개별 기업의 실제 현장에 맞게 번역해 적용하는 것은 전혀 다른 역량이다. 표준은 있는데 이를 현장에 이식할 사람이 없는 것, 이것이 지금 정책이 채워야 할 지점이다.
15.회사의 언어로 직무가 정리되는 순간 사업주는 관리할 수 있는 단위를 얻을 수 있고 구성원은 성장할 수 있는 지도를 얻을 수 있다. 서로 다른 것을 원한다고 여겨졌던 두 욕구가 사실은 같은 공백 때문에 부딪히고 있었던 것이다. 중소기업 인력난 해소는 중소기업만이 만들 수 있는 성장의 발판을 세우는 데서 시작된다고 본다.
E.O.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