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가 존경하는 인하트 대표님 박선나 코치님은 매월 첫째 주 월요일을 통째로 비워두신다고 했습니다. 오직 단 한 사람, 한 영혼을 위해서요. 이름하여 인하트정원입니다. 그 하루만큼은 다른 일정을 잡지 않고, 그 한 사람의 이야기에만 온전히 귀를 기울이기 위해서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감사하게도, 9월 첫째 주 월요일의 주인공으로 저를 불러주셨습니다.
솔직히, 초대를 받은 순간부터 마음이 이상했습니다. 누군가가 나를 위해 반나절을 비워둔다는 것. 내 이야기를 듣기 위해 시간을 미리 마련해 두시고 집 문을 열어주신다는 것. 그 사실만으로 저는 오랜만에 특별해지는 기분을 느꼈습니다. 요즘의 저는 그런 기분과 꽤 멀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함께 점심을 먹고, 코치님 댁으로 자리를 옮겨 차를 마셨습니다. 볕이 좋은 오후였고, 아파트지만 제가 추구하는 한옥의 툇마루로 인테리어된 자리에 마주앉았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저는 오래 참아두었던 많은 말들을 쏟아내기 시작했습니다.
무엇이 그 말들을 꺼내게 했을까요. 돌아보면 아주 단순했습니다. 제 앞에 앉은 코치님이 이렇게 제 감정을 대신 말해주었기 때문입니다.
"정말 많이 힘들었겠어요." "억울한 마음이 드는 게 당연하지요." "그 시간을 어떻게 살아냈는지, 저같으면 너무 힘들었을 것 같아요."
이 몇 마디가 무엇을 열었는지, 저는 그날에서야 알았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제 감정에게 문을 열어준 적이 없었습니다. ‘괜찮아’, ‘나는 괜찮아’ ‘그래도 감사해야지’ 라는 신앙의 언어를 빌려, 저는 늘 제 감정을 그렇게 눌러왔습니다. 감사는 좋은 것이지만, 감사가 감정을 덮는 뚜껑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그때 알았습니다.
눌린 감정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다만 이름을 잃은 채 안쪽 어딘가에서 사라지지 않은채 쌓여갈 뿐입니다.
그날 저는 처음으로 그 감정들을 꺼내 하나씩 이름을 붙여주었습니다. 서운함. 억울함. 외로움. 그리고 두려움. 이름을 붙이자 신기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감정이 커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조금 편안해졌습니다. 정체를 알 수 없어 무섭던 것이, 이름을 얻자 마주 볼 수 있는 것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대화의 마무리로 저는 오라소마(Aura-Soma) 컬러 테라피를 받았습니다. 여기서 잠시, 낯설게 느끼실 분들을 위해 짧게 설명을 덧붙입니다.
오라소마는 1980년대 초 영국에서 시작된 '빛깔 시스템'입니다. Aura는 빛, Soma는 존재(Being) 또는 몸(Body)을 뜻하니, 이름 그대로 '빛의 존재'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인간은 본래 빛의 존재이며, 우리의 몸은 그 빛을 이 땅으로 가져오는 통로라는 시선입니다.
방식은 아주 단순합니다. 두 겹의 색으로 나뉜 백여 개의 유리병 가운데, 아무 설명 없이 마음이 끌리는 네 개를 순서대로 고르는 것. 그리고 그 선택이 차례대로 나의 영혼의 본질과 과제, 현재와 지향점을 비춰줍니다. 그래서 오라소마를 '영혼의 거울(Mirror of Soul)'이라 부른다고도 합니다. 무엇을 진단해 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고른 색을 통해 내 안의 것이 되비쳐 나오는 구조이기 때문입니다.
그날 코치님은 이런 이야기도 들려주셨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가장 먼저 만드신 것이 빛이었다고요. 모든 것의 시작에 빛이 있었다는 그 문장이, 색을 통해 나를 들여다보는 이 시간의 의미를 조용히 설명해 주는 것 같았습니다.
솔직히 저는 미신을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서 내내 궁금했습니다. 이건 과학일까, 심리일까. 지금의 제 결론은 이렇습니다. 색을 고르는 그 순간, 우리는 가장 정직한 무의식의 손끝을 따라갑니다. 그리고 그렇게 고른 색 앞에서, 평소라면 결코 꺼내지 않았을 이야기를 스스로 꺼내게 됩니다. 색이 답을 주는 것이 아니라, 색이 나에게 질문을 걸어오는 것입니다. 그 점에서 오라소마는 점(占)이라기보다, 자기 자신과 대화하도록 돕는 아주 정교한 말 걸기의 도구에 가깝다고 저는 느꼈습니다.
저는 아무 정보 없이, 그저 눈이 가는 대로 네 개를 골랐습니다. 그런데 나란히 놓인 그 병들이 들려준 이야기는 소름이 돋을 만큼 정확했습니다. 그것은 낱낱의 해석이 아니라, 제가 지나온 시간과 지나갈 시간을 잇는 하나의 서사였습니다.
첫 번째 병 — 'Soul Bottle'. 위층은 그린, 아래층은 마젠타였습니다. 영혼의 목적과 본질을 비추는 bottle이라고 했습니다. 그린은 가슴과 공간, 그리고 삶의 방향성을 뜻하고, 마젠타는 신성한 사랑과 아주 작은 것까지 살피는 정성을 뜻합니다. 해석은 이랬습니다. 당신은 마음의 여유와 공간을 지니고 주변을 보살피며, 사소한 일에도 깊은 사랑을 담아 사람을 치유하고 돕는 길을 걷는 사람이라고. 직관과 마음의 소리를 따라 방향을 찾아가는 힘이 있다고요. 20년 동안 사람을 세우는 일을 해온 이유가, 우연이 아닌 영혼의 이끌림이었구나 싶었습니다.
두 번째 병 — 현재의 도전과 과제. 투명한 층과 아주 연한 핑크였습니다. 투명은 눈물 또는 자의식의 명료함과 정화를, 핑크는 조건 없는 사랑과 자기 수용을 뜻한다고요. 타인을 돌보고 챙기는 데는 익숙하지만, 정작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고 스스로에게 너그러워지는 일은 어려워했을 것이라는 말에 마음이 내려앉았습니다. 지금 저의 가장 큰 성장 과제는 "나의 부족함까지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사랑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정말 소름이 돋았습니다. 저는 요즘 남이 나를 사랑해주지 않는 것보다, 내가 나를 사랑하지 못하는 것이 더 큰 문제인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받지 못한 인정의 자리를 자책으로 채우며 스스로를 지하 100층까지 끌어내리고 있었습니다. 고개를 들지 못하고 다녔고, 예전처럼 웃지 못하는 저를 자주 발견하곤 했습니다.
세 번째 병 — 현재의 심리. 마젠타와 오렌지였습니다. 마젠타의 깊은 사랑과 오렌지의 통통튀는 자신감이 만난 색의 조합이고, 해석은 이랬습니다. 내면의 통통튀는 나다움을 지금은 다른 색으로 덮고 있다고. 하지만 덮고 있는 색이 탁하지만 사랑을 의미하는 마젠타로 내면의 빛을 되찾으며 감정의 안정과 참된 기쁨을 회복해 가는 단계라고.
네 번째 병 — 미래의 가능성과 지향점. 퍼플과 마젠타. '나이팅게일'이라는 이름이 붙은 병이라고 했습니다. 영적 변화와 영감의 퍼플, 무조건적인 봉사와 사랑의 마젠타가 만난 '치유자이자 리더'의 병. 나를 온전히 수용하고(2번) 내면의 지혜를 되찾은(3번) 다음, 더 깊은 직관과 통찰로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건네는 삶에 이르게 된다는 뜻이라고 했습니다.
가장 마음에 남은 것은, 네 병에 공통으로 핑크(마젠타) 빛이 포함이 되어 있고, 핑크는 사랑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누군가와 억지로 가까워지려 애쓰거나, 나를 낮출 필요가 없다는 것. 사랑의 사람이니 그 사랑의 빛과 원래의 오렌지와 같은 에너지를 회복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날 이후 곱씹은 깨달음이 있습니다.
그동안 저는 사람의 마음을 다루는 일을 해왔습니다. 강의를 하고, 코칭을 배우고, 조직의 문화를 고민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타인에게 공감하는 일이 가장 어려웠습니다. 왜였을까요. 이제야 알겠습니다. 제 안의 감정을 한 번도 제대로 만나본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이렇게 배웠습니다. 화내지 마라, 짜증 내지 마라, 감정적으로 굴지 마라. 그래서 감정을 다루는 법이 아니라, 감정을 누르는 법을 익혔습니다. 그렇게 자란 사람은 남의 감정 앞에서도 같은 잣대를 듭니다. 그게 뭐 그리 힘든 일이라고. 직장 생활에서 저 정도는 당연한 거 아닌가. 왜 저렇게 유난일까. 부끄럽지만 저에게도 그런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감정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감정에 정확한 이름을 붙이고, 그 감정 이후에 어떤 반응을 선택하느냐입니다. 감정을 없애는 게 아니라 다루는 것, 그것이 성숙입니다.
그러니 이제 저는 순서를 바꾸려 합니다. 가장 먼저 제 감정에 이름을 붙이고, 이렇게 말해주려 합니다.
"너 정말 힘들었구나. 죽을 만큼 힘든데 어떻게 이렇게 버티고 살아냈니. 아무도 네 마음을 몰라줘서 정말 억울했겠다."
이렇게 자신을 안아본 사람만이, 남의 어깨에도 진짜 손을 얹을 수 있습니다. 어설픈 위로로 "괜찮아질 거야" 하고 서둘러 덮어버리지 않고, 그 사람의 감정 곁에 조용히 앉아 있을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 생각이 닿았을 때, 오래 알고 있었지만 처음 이해한 문장이 하나 떠올랐습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 문장에는 이웃 사랑의 엄청난 조건이 숨어 있습니다. 자기 몸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라야, 그만큼 이웃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 내 안에 사랑이 고여 있지 않은 사람은, 남에게 부어줄 것도 없습니다. 자기 사랑은 이기심이 아니라, 타인을 사랑하기 위한 가장 성실한 준비였습니다.
네 번째 병이 '치유자'를 가리키면서도, 그 앞에 반드시 '자기 수용'이라는 두 번째 병을 놓아둔 이유가 여기 있었습니다. 순서가 있었던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는 일이 먼저였습니다.
올해 저는 여러 편의 칼럼에서 제 흔들림을 솔직하게 고백해 왔습니다.
돌아보면 그 모든 글의 밑바닥에는 “나는 나를 사랑하지 못하고 있었다” 라는 하나의 문장이 깔려 있었습니다. 이제는 조금 다르게 써보려 합니다. 지하 100층에서 지상으로 올라오는 데 거창한 것은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나를 위해 반나절을 비워둔 한 사람, 코치님. 그 분이 내 감정에 이름을 붙여준 몇 마디의 공감, 그리고 색깔들이 건넨 조용한 공감과 위로. 그것이면 충분했습니다.
혹시 지금, 저처럼 고개를 들지 못한 채 걷고 계신분이 있으시다면. 예전처럼 웃지 못하는 자신을 문득 발견하셨다면. 남들의 인정이 오지 않는 자리에서 스스로를 자꾸 아래로 아래로 지하 100층까지 끌어내리고 계신다면. 부디 오늘, 자신에게 이렇게 말해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기억해 주시길 바랍니다. 지금 길 위에 선 것처럼 느껴지는 방랑의 시간도, 결국 어딘가로 향하고 있다는 것을요. 태초에 가장 먼저 만들어진 것이 빛이었듯이, 우리 각자의 시작에도 빛이 있었습니다. 나를 향한 다정함과 위로가 조금씩 쌓일 때, 우리는 다시 고개를 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