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9년의 프랑스는 하나의 나라라고 말하기 어려웠다. 백년전쟁은 이미 거의 한 세기 가까이 이어지고 있었고 왕위의 정통성까지 흔들리고 있었다. 1415년 아쟁쿠르에서 프랑스군이 잉글랜드의 헨리 5세에게 크게 패한 뒤 북부의 상당 지역은 잉글랜드와 부르고뉴 세력의 영향 아래 들어갔다. 1420년 트루아 조약은 프랑스 왕 샤를 6세가 죽은 뒤 헨리 5세와 그의 후손이 프랑스 왕위를 계승하도록 하는 틀을 만들었다. 왕세자 샤를은 사실상 계승구도에서 밀려났다.
1422년에는 상황이 더 복잡해졌다. 헨리 5세와 샤를 6세가 몇 달 차이로 모두 죽었다. 잉글랜드 측은 아직 갓난아이였던 헨리 6세를 프랑스의 왕으로 내세웠고, 프랑스 남부와 중부 일부에서는 왕세자 샤를을 정통 후계자로 보았다. 파리는 잉글랜드와 부르고뉴 세력의 영향 아래 있었고 샤를의 궁정은 루아르 남쪽 시농에 머물렀다.
샤를에게 병력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장수도 있었고 성도 있었으며 자신을 지지하는 귀족도 있었다. 문제는 그것들이 하나의 승리조건으로 묶이지 않았다는 데 있었다. 전쟁을 계속해야 한다는 데는 동의했지만 어디를 먼저 되찾아야 하는지, 무엇을 지켜야 하는지, 누가 진짜 왕인지에 대한 확신은 약했다.
그때 오를레앙이 포위됐다.
오를레앙은 단순한 한 도시가 아니었다. 잉글랜드군이 이곳을 장악하면 루아르 강 남쪽으로 더 깊이 진격할 수 있었다. 샤를 세력에게는 군사적으로도 상징적으로도 버티기 어려운 압박이었다. 1428년 가을부터 이어진 포위가 길어질수록 샤를의 정권은 ‘언젠가 왕이 될 사람의 궁정’이 아니라 ‘조금씩 밀려나는 세력’에 가까워졌다.
그런 시기에 도무레미의 한 농촌 소녀가 나타났다. 그녀는 군대를 가진 사람도 아니었고 기름진 영지를 가진 귀족도 아니었다. 심지어 왕실의 관직도 없었다. 하지만 몇 달 뒤 프랑스군은 오를레앙의 포위를 풀었고, 두 달여 뒤 샤를은 랭스 대성당에서 왕관을 썼다.
잔다르크가 한 일의 핵심은 그 사이에 있었다.

직원 일흔 명쯤 되는 회사가 있다. 회사는 6개월 뒤 반드시 새 서비스를 출시해야 한다. 영업팀은 이미 고객에게 일정을 약속했고 개발팀은 기능이 너무 많다며 범위를 줄여야 한다고 한다. 운영팀은 지금 인력으로는 서비스가 출시돼도 감당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재무팀은 추가예산을 승인하기 어렵다고 한다.
이들은 모두 열심히 일하고 있다. 그런데 회의가 끝날 때마다 각 부서는 자기 일만 더 선명해진다.
영업팀장은 ‘고객과 약속한 기능’을 보고 개발팀장은 ‘품질’을 본다. 운영팀장은 ‘장애가 났을 때 누가 책임질 것인가’를 보고 대표는 모든 말을 듣고 “서로 잘 협의해보라”고 말한다.

회사 TF에 전략기획 대리 한 명이 있다. 사람을 평가할 권한도 없고 예산을 승인할 수도 없다. 누구에게 야근을 명령할 위치도 아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가 회의실 화이트보드에 한 문장을 쓴다.
‘6월 30일까지 계약고객 세 곳이 실제로 사용할 수 있는 상태를 만든다.’
그리고 묻는다.
“이 목표를 위해 정말 필요한 기능이 무엇일까요?”
그 말에 회의가 조금 달라진다.
영업은 고객 세 곳이 반드시 요구하는 기능과 있으면 좋은 기능을 나누기 시작한다. 개발은 최소구현 범위를 다시 계산한다. 운영은 세 곳만 먼저 대응한다면 가능한 인력배치를 제안한다. 재무는 전체 프로젝트 예산이 아니라 출시까지 필요한 비용을 다시 본다. 그렇다고 그 대리가 갑자기 상사가 된 것은 아니다.
사람들이 그 사람의 말을 듣기 시작한 이유는 그에게 직함이 생겨서가 아니라 각자의 일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가 조금 선명해졌기 때문이다. 물론 대부분의 회사에서 위의 이야기는 이상적인, 꿈같은 이야기지만..
그렇다면 조직을 움직이는 힘은 언제나 명함에서 나오는 것일까.
잔다르크는 1412년 무렵 프랑스 동북부의 도무레미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녀 자신이 남긴 재판기록에 따르면 어린 시절부터 성 미카엘과 성녀 가타리나, 성녀 마르가리타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믿었다. 그 목소리는 프랑스를 돕고 왕세자 샤를을 랭스로 데려가 대관시키라는 사명으로 이어졌다.
진짜 기적이었을까? 아무래도 그 진위는 별 상관이 없을 것 같다. 중요한 것은 잔다르크 자신이 그것을 의심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녀에게 전쟁은 막연한 ‘프랑스를 구한다’는 목표가 아니었다. 그녀는 먼저 샤를에게 가고 오를레앙을 구하고 그리고 랭스로 가서 샤를에게 왕관을 씌운다.
그녀가 프랑스를 구하는 일은 순서가 있었다.
1428년 잔다르크는 가까운 보쿨뢰르의 수비대장 로베르 드 보드리쿠르를 찾아갔다. 처음에는 당연히 거절당했다. 농촌 출신의 젊은 여성이 왕을 만나게 해달라고 요구한다고 해서 군사조직이 곧바로 움직일 이유는 없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돌아왔다. 특히 주변에서 그녀의 말을 믿는 사람이 조금씩 생겼다. 장 드 메츠와 베르트랑 드 풀렝지 같은 사람들이 동행자로 붙었다. 결국 보드리쿠르도 길을 열어줬다. 잔다르크는 남장을 하고 잉글랜드가 점령한 적대지역을 지나 시농으로 향했다.
1429년 3월 무렵 시농에서 그녀는 샤를을 만났다. 그리고 그녀는 푸아티에에서 성직자들의 검토를 거쳤으며 마침내 오를레앙으로 갈 수 있는 지원을 얻었다. 물론 처음부터 모두가 그녀를 믿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여러 단계의 검증을 통과해야 했다. 그럼에도 잔다르크가 궁정에 들어온 순간 하나의 새로운 언어가 생겼다.
여기서 ‘버티자’가 아니라 ‘랭스까지 간다.’

잔다르크는 1429년 4월 말 오를레앙에 들어갔다. 이때 그녀가 ‘프랑스군 총사령관’이 된 것은 아니었다. 오를레앙에는 이미 장 드 뒤누아를 비롯한 경험 많은 지휘관들이 있었고 잔다르크에게 현대적 의미의 정규 지휘권이 주어진 것도 아니었다. 다만 그녀에게는 갑옷과 말, 수행원과 군기가 주어졌다. 그녀는 전투회의에 참여했고 공격을 독려했다. 그러나 군대 전체가 한 소녀의 법적 명령에 따라 움직인 것은 아니었다지만 그녀가 불러온 변화는 컸다.
프랑스군은 그동안 포위망 속에서 주로 버티는 쪽이었다. 그러나 잔다르크가 들어온 뒤 공격의 속도와 방향이 달라졌다. 5월 초 잉글래드가 점령한 여러 요새를 연이어 공격했고 5월 7일 투렐 요새 전투에서 잔다르크 자신도 화살에 맞아 부상했다. 그녀는 전장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왔고 다음 날 잉글랜드군은 포위를 풀고 물러났다.

물론 그녀 혼자 전투에서 승리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조직에는 전투기술만큼 중요한 것이 있다.
바로 ‘우리가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공동의 확신이다. 손자가 손자병법에서 말한 ‘上下同慾者勝’과 같다.
잔다르크는 일반적인 장수보다 창을 잘 쓰는 사람이 아니었다. 기록상 자신이 직접 적을 죽였다고 말하지도 않았다. 대신 군기를 들고 전선 가까이에 있었으며 후퇴하던 사람을 다시 돌려세웠다. 그녀가 가져온 것은 새로운 병종이나 무기가 아니었다. 잊고 있던 전투의 의미였다.
오를레앙은 지켜야 할 도시가 아니라 앞으로 나가기 위해 반드시 풀어야 할 첫 번째 문이 됐다.
그러나 오를레앙을 구했다고 전쟁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우리는 여기서 잔다르크의 역할을 더 선명하게 볼 수 있다. 승리한 조직은 흔히 다음 목표에서 다시 갈라진다.
잉글랜드군을 더 추격할 것인가.
빼앗겼던 수도인 파리를 노릴 것인가.
지금까지 점령한 점령지를 정리할 것인가.
이쯤에서 잉글랜드와 정치협상을 할 것인가.
그러나 잔다르크가 반복해서 강조한 목적지는 랭스였다.
랭스는 프랑스 왕이 전통적으로 대관식을 치르는 도시였다. 샤를이 스스로 왕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랭스 대성당에서 성유를 받고 왕관을 쓰는 것은 당시 정치세계에서 같은 일이 아니었다. 헨리 6세의 프랑스 왕위 주장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대관식은 단순한 의례가 아니라 정통성을 눈에 보이는 현실로 만드는 정치행위였다. 역사에서 정통성은 때로는 실질적인 권력보다도 훨씬 강력한 힘을 내보이곤 했다.
오를레앙 이후 프랑스군은 루아르 일대에서 자르조, 묑, 보장시를 거쳐 잉글랜드군을 밀어냈고 6월 18일 파테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뒀다. 그 뒤 샤를과 잔다르크 일행은 북동쪽 랭스로 향했다.
쉬운 길은 아니었다. 그 사이에는 아직 태도가 불확실하거나 부르고뉴 측과 연결된 도시들이 있었다. 트루아에서도 처음에는 문을 열지 않았다. 그러나 협상과 압박 끝에 길이 열렸고 7월 16일 랭스가 일행을 받아들였다.

다음 날인 1429년 7월 17일 샤를은 랭스 대성당에서 샤를 7세로 대관했다. 잔다르크는 곁에 있었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그녀는 그저 시골 소녀였을 뿐이다.
그런데 그녀가 처음부터 말했던 순서가 현실이 됐다.
오를레앙 그리고 랭스.
여기서 잔다르크의 힘을 ‘사람들이 그녀를 좋아해서’라고만 설명하면 부족하다.
그녀는 사람들에게 목표의 우선순위를 제공했다.
조직은 명령으로만 움직이지 않는다. 특히 여러 이해관계자가 임시로 모인 조직에서는 더 그렇다.
1429년의 샤를 진영에는 귀족이 있었고 용병이 있었고 지방군과 궁정관료가 있었다. 잔다르크가 그들 모두의 상관이 된 적은 없다. 그녀가 노련한 장군인 뒤누아에게 인사권을 행사할 수 있었던 것도 아니다. 라 이르에게 영지를 줄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왕실 재정을 마음대로 쓸 수도 없었다.
그런데도 그녀의 존재는 의사결정에 영향을 줬다. 이때 ‘카리스마’라는 말은 편리하지만 충분하지 않다. 카리스마는 왜 사람들이 따랐는지를 인물의 매력으로 돌려버리기 쉽다. 잔다르크의 경우에는 사명 자체가 더 중요했다. 그녀는 자신이 무엇을 위해 왔는지 반복해서 말했다. 잉글랜드군을 몰아내고 샤를을 랭스에서 대관시킨다는 것이었다.

조직에서 공식권한이 약한 사람이 영향력을 가지려면 최소한 하나는 있어야 한다. 사람들이 자기 일을 다시 해석할 수 있는 기준이다.
오를레앙 수비대에게는 ‘버티는 전투’가 ‘왕을 랭스로 보내기 위한 첫 전투’로 바뀌었다. 샤를에게 대관식은 언젠가 치를 의례가 아니라 지금 군대를 움직여야 하는 이유가 됐다. 여러 장수에게 개별 전투의 승리는 하나의 연속된 경로 안에 들어갔다.
오늘날에는 이런 상태를 Mission Alignment라고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영어 단어가 아니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지금 이것부터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조직 전체에서 비슷해지는 순간이다.
랭스에서의 대관식이 끝난 이후, 공기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잔다르크가 처음 말했던 목표가 달성되자 사람들의 표정이 조금씩 달라졌다. 프랑스의 모든 사람이 계속 같은 목적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잔다르크는 군사적 압박을 이어가 파리를 되찾는 방향을 원했다. 반면 샤를 7세와 궁정에는 부르고뉴 공작과 협상하며 정치적 안정을 확보하려는 계산도 있었다. 결국 1429년 9월 프랑스군은 파리를 공격했지만 공격은 성공하지 못했다.

잔다르크는 부상했고 샤를은 철수를 명했다.
오를레앙에서 랭스까지는 잔다르크의 사명과 샤를의 필요가 거의 같은 방향을 향했다. 왕세자는 왕이 되어야 했고 잔다르크는 그를 왕으로 만들겠다고 했다. 그러나 샤를이 왕관을 쓴 뒤에는 둘의 시간표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잔다르크에게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지만 왕에게는 이제 전쟁뿐 아니라 외교와 귀족관계, 재정과 통치까지 고려해야 했다.
누가 배신했다고 단순화할 필요는 없다. 임무가 완수되는 과정에서 이해관계가 달라진 것이다.
이 대목은 조직에서 매우 중요하다. 강력한 미션은 사람들을 빠르게 묶지만 미션의 한 단계가 끝난 뒤에도 모두가 자동으로 같은 방향을 보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 목표를 다시 합의하지 않으면 한때 가장 강했던 정렬이 오히려 갈등이 된다.
1430년 잔다르크는 콩피에뉴 방어에 참여했다가 부르고뉴군에게 붙잡혔다. 그러자 그녀를 둘러싼 정치적 가치도 달라졌다.
오를레앙으로 들어갈 때의 잔다르크는 샤를 진영이 필요로 했던 상징이었다. 포로가 된 뒤 그녀는 잉글랜드 측에 넘겨졌고 루앙에서 재판을 받았다.
1431년의 재판은 단순한 종교논쟁만으로 볼 수 없다. 그녀가 신의 명령을 받아 샤를을 대관시켰다고 주장한 이상 그녀의 권위를 이단이나 기만으로 규정하는 것은 샤를 7세의 정통성에도 정치적 의미를 가졌다.
재판에는 보베의 주교 피에르 코숑이 중요한 역할을 했고 파리대학 계열 성직자들이 참여했다. 잔다르크는 자신의 계시와 복장, 교회에 대한 복종 등을 두고 반복적으로 심문받았다. 이때 남은 기록 덕분에 우리는 잔다르크 자신의 말에 비교적 가까이 접근할 수 있다.

그녀는 학식 있는 신학자가 아니었고 체계적인 라틴어 교육을 받은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질문을 이해하지 못하면 다시 물었고 자신이 대답하지 않겠다고 판단한 것에는 쉽게 끌려가지 않았다.
1431년 5월 30일 결국 잔다르크는 루앙의 시장에서 화형당했다. 그녀의 나이는 열아홉 안팎이었다.
그리고 약 25년 뒤 상황은 다시 달라졌다.
샤를 7세의 왕권은 훨씬 안정됐고 잉글랜드 세력은 프랑스에서 크게 밀려났다. 교황 갈리스토 3세의 권위 아래 진행된 재심에서 1456년 7월 7일 기존 판결은 무효로 선언됐다.
같은 사람의 행동이 정치질서에 따라 ‘이단의 증거’였다가 ‘잘못된 판결의 피해’로 다시 읽힌 것이다. 역사는 잔다르크가 옳았기 때문에 자동으로 그녀를 구해준 것이 아니다.
그녀는 이미 죽은 뒤였다.
조직의 미션을 움직이는 사람과 조직이 그 사람을 끝까지 보호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잔다르크는 ‘젊은 혁신인재’는 아니다. 그녀가 살던 사회는 봉건적 신분질서와 종교적 세계관이 지배했고 전쟁과 왕권의 정통성도 오늘날과 비교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구조 하나는 볼 수 있다. 바로 공식권한이 부족한 사람이 조직의 방향에 영향을 주는 방식이다.
직함이 없는 사람은 명령하거나 지시할 수 없다. 그렇기에 예산을 줄 수도 없고 평가점수를 깎을 수도 없다.
그래서 더 선명한 것이 필요하다.
왜 이 일을 하는지, 무엇을 먼저 해야 하는지, 어디까지 가면 이번 임무가 끝나는지.
잔다르크의 말은 놀랄 만큼 구체적이었다.
샤를을 돕는다.
오를레앙을 구한다.
랭스에서 대관한다.
‘프랑스를 위대하게 만들자’ 같은 추상적 문장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미션만 선명하면 조직이 저절로 움직인다는 뜻도 아니다.
잔다르크에게는 뒤누아와 여러 장수의 군사역량이 필요했다. 샤를의 승인도 필요했고 돈과 병력도 필요했다. 랭스까지 가는 도시들이 문을 열어줘야 했다.
미션은 결코 자원을 대신하지 않는다. 하지만 흩어진 자원이 같은 방향으로 쓰이게 만들 수는 있다.
그래서 Mission Alignment는 슬로건을 만드는 일이 아니다. 각 부서와 사람이 자기 일을 같은 승리조건에 연결할 수 있게 만드는 일이다.
처음의 회사는 여전히 6월 30일 출시를 앞두고 있다. 그사이 전략기획 대리는 대표가 되지 않았다.
영업팀장도 여전히 영업을 책임지고 개발팀장의 기술적 판단권도 그대로다.
다만 회의에서 질문이 조금 달라졌다.
“이 기능이 고객 세 곳의 실제 사용에 반드시 필요할까?”
“이 일정이 6월 30일이라는 목표에 어떤 영향을 줄까?”
“출시 이후 세 고객을 안정적으로 운영하려면 지금 무엇을 포기해야 할까.”
이 질문은 모든 갈등을 없애지 않는다. 오히려 갈등을 더 정확하게 만든다. 그리고 정확한 갈등은 무엇을 해결해야 하는 지를 좀 더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누군가의 요구를 거절해야 할 수도 있고 기능을 포기해야 할 수도 있다. 영업이 고객에게 약속을 다시 해야 하고 개발이 원하는 완성도를 잠시 낮춰야 할 수도 있다.
Alignment는 모두가 기분 좋게 동의하는 상태가 아니다. 서로 다른 사람이 같은 결과를 위해 무엇을 선택하고 무엇을 포기할지 알게 되는 상태에 가깝다.
잔다르크가 프랑스군에게 명령할 수 있는 공식 직함은 크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오를레앙과 랭스를 하나의 길로 묶었다.
그리고 그 길이 선명했던 몇 달 동안 서로 다른 사람들은 같은 방향으로 움직였다.
직함이 없는 사람이 조직을 움직일 수 있느냐는 질문은 어쩌면 조금 틀렸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지금 우리 회사에서 직함과 권한이 가장 큰 사람은 누구인가보다 먼저 물어야 할 것이 있다.

우리가 오늘 한 일이, 우리가 승리하기 위해 가는 여정의 어느 이정표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