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무 트렌드 2027 3. 품의서보다 파일럿

총무 트렌드 2027 3. 품의서보다 파일럿

해봄경제('Have-a-Go' Economy) + 폼팩터 시프트(Plasticity in the Form Factor Shift)
조직문화Tech HR조직설계총무전체
준용
최준용Oct 29, 2026
2606

스타트업과 대기업의 차이는 '실행력'이 아닐까? 기업의 규모와 실행의 유연함은 반비례하는 듯하다. AI 활용만 해도 그렇다. 스타트업들이 날아다니는 사이, 규모가 큰 조직은 한 걸음씩 신중하게 움직인다. 누구의 잘못이라기보다 구조의 문제다. 몸집이 클수록 의사결정에 관여하는 사람이 많아지고 의견 또한 다양해진다. 그만큼 실패를 피하는 일 못지않게, 실패했을 때 책임을 나눌 절차를 미리 갖춰 두는 일이 중요해진다.

"Done is better than perfect."

페이스북 본사 벽에 걸려 있던 문구다. 마크 저커버그는 2012년 상장 당시 투자자에게 보낸 서한에서 "계속 내놓으라"는 뜻으로 이 말을 벽에 써 두었다고 밝혔다. 완벽한 것보다 일단 끝낸 것이 낫다는 뜻이다.
그러나 총무의 세계에서는 어떨까? 반대다. 끝낸 것보다 완벽한 것이 낫다. 사고가 나지 않는 것, 민원이 들어오지 않는 것, 결재가 한 번에 통과되는 것. 많은 총무들이 오랫동안 미덕으로 삼아 온 것들이다.

예를 들어 보자. 회의실 예약을 공유 엑셀 시트로 관리하는 회사가 있다. 중복 예약과 노쇼가 잦아지자 예약 시스템을 도입하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품의서로 가는 길>
최부장 : 김대리, 회의실 예약 시스템 하나 도입해 보자.
김대리 : 네, 솔루션 세 곳 비교표 만들고, IT팀 보안 검토 받고, 견적까지 붙여서 품의 올리겠습니다.
(석 달 뒤) 결재는 났다. 시스템도 열렸다. 그러나 구성원들은 여전히 메신저로 "3시에 회의실 쓰셔도 돼요?"를 묻고 있다.

<먼저 바꿔 보는 길>
최부장 : 김대리, 회의실 예약 시스템 하나 도입해 보자.
김대리 : 후보 솔루션 두 곳을 무료 체험판으로 7층 회의실 세 곳에서 2주씩 돌려 보겠습니다. 중복 예약 건수와 노쇼 비율, 사용자 의견만 받아서 보고드리겠습니다.
(2주 뒤) 한 곳은 아무도 쓰지 않았다. 다른 한 곳은 별도 안내 없이도 중복 예약이 사라졌다.

다소 극단적인 비교이지만 어느 쪽이 더 '기업친화적'으로 보이는가? 아마 품의서를 먼저 작성하는 쪽일 것이다. 그렇다면 어느 쪽이 더 '정확한' 답을 가져오는가? 뒤쪽이다. 앞의 김대리는 석 달 동안 예측했고, 뒤의 김대리는 2주 동안 관찰했다. 품의서는 미래를 설명하는 문서가 아니다. 결재권자를 설득하는 문서다. 둘은 다르다.

물론 뒤의 김대리도 결국 품의서를 쓴다. 다만 그 품의서에는 "도입하면 중복 예약이 줄어들 것으로 예상됩니다" 대신 2주간 실제로 관찰한 숫자가 들어간다. 파일럿은 품의서를 없애는 방법이 아니다. 품의서의 근거를 미리 만들어 두는 방법이다.

일단 해 보는 사람들의 시대

《트렌드 코리아 2027》은 먼저 시도하고, 그 과정에서 배우며 새로운 가치와 기회를 만드는 흐름을 해봄경제('Have-a-Go' Economy)라 부른다. 예전에는 충분히 배우고 조직을 갖춘 뒤에야 실행할 수 있었다. 지금은 순서가 뒤집혔다. 일단 시작하고, 진행하면서 배우고, 내놓은 뒤에 고친다. 김난도 교수팀은 설명서대로 조립하는 DIY를 넘어 설계도부터 스스로 그리는 GIY(Generate It Yourself)의 등장을 짚어 준다. 한 대학생이 AI로 그늘길만 골라 걷는 앱을 2주 만에 만들어 9만 명이 썼다는 사례도 함께 소개된다.

배경은 단순하다. 첫 시도의 비용이 낮아졌다. 1부에서 AI가 견적 비교표를 3분 만에 만든다고 했다. 같은 이유로 시범 운영 계획서도, 설문 문항도, 결과 요약도 단 몇 분이면 나온다. 준비에 드는 공수가 줄었으니, 준비에 쓰던 석 달을 실행에 쓸 수 있게 된 것이다.

필자는 개발자가 아니다. 그러나 요즘은 총무 업무를 편하게 만들어 주는 자동화 툴들을 직접 만들어 쓰고 있다. 방문객 등록 시스템, 화장실 이용 현황, 우편물 알림 시스템 등 완성품이 나오기를 기다렸다면 아직 시작도 못 했을 것들이다. 우편물 알림을 붙인 뒤 수신자를 찾아 한 명씩 연락하고 찾아가지 않은 우편물 찾아가라고 재차 안내하던 번거로움이 사라졌다. 만들고, 써 보고, 고치기를 반복하는 중이다. 해봄경제는 거창한 창업 이야기가 아니다. 내 책상 위의 문제를 내가 먼저 풀어 보는 태도의 문제다.

다른 하나는 폼팩터 시프트(Plasticity in the Form Factor Shift)다. 제품의 물성, 구조, 사용 방식을 바꿔 새로운 경험과 시장을 만드는 흐름이다. 기술이 상향 평준화되면서 이미지의 화소나 처리 속도 같은 스펙 차이는 더 이상 크게 체감되지 않는다. 사람을 움직이는 것은 스펙이 아니라 모양과 쓰임이다. 뚜껑을 아래로 향하게 세운 하인즈의 탑다운 케첩, 바퀴를 달아 거실 밖으로 끌고 다니게 만든 LG 스탠바이미가 좋은 예시가 아닐까. 케첩은 뚜껑을 아래로 돌렸을 뿐이고, 스탠바이미는 TV에 바퀴를 달았을 뿐이다. 기능은 그대로인데 쓰는 사람의 평가가 달라졌다.

두 키워드는 서로 다른 챕터에서 소개되지만, 총무의 책상 위에서는 하나의 질문으로 합쳐진다. 우리가 제공하는 서비스의 형태를 바꾸는 실험을 작은 규모로 지금 당장 시작할 수 있는가?

총무의 파일럿이란?

먼저 오해를 하나 걷어 내야 한다. 파일럿은 규모만 줄인 정식 도입이 아니다. 질문 자체가 다르다. 정식 도입은 "이것을 할 것인가"를 묻고, 파일럿은 "이것이 우리 회사에서 작동하는가"를 묻는다. 앞의 질문에는 결재권자가 답하고, 뒤의 질문에는 현장이 답한다.

아마존의 제프 베이조스는 2015년 주주서한에서 결정을 두 종류로 나눴다. 한 번 지나면 되돌아올 수 없는 일방향 문(one-way door), 그리고 들어가 보고 아니다 싶으면 다시 나올 수 있는 양방향 문(two-way door)이다. 그는 대부분의 결정이 양방향 문인데도 조직이 커질수록 양방향 문에까지 일방향 문의 무거운 절차를 적용하느라 느려진다고 경고했다.

총무 업무를 이 기준으로 나눠 보면 의외의 결과가 나온다. 대부분이 양방향 문이다. 한 개 층에서 2주간 운영해 본 좌석 배치는 되돌릴 수 있다. 회의실 예약 방식도, 비품 신청 절차도, 복지 포인트 배분도 그렇다. 되돌릴 수 없는 것은 사옥 임대차 계약, 대형 구조 공사, 안전 설비 정도다. 그런데 우리는 월 구독료 몇십만 원짜리 시스템 하나에도 사옥 계약과 같은 무게의 품의서를 쓴다. 신중함이 아니라 관성이다.

여기까지 읽고 이렇게 생각하는 총무도 있을 것이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 회사는 파일럿도 결재를 받아야 한다. 맞다. 파일럿도 결재를 받는다. 다만 올라가는 질문이 다르다. 품의서는 "이 시스템을 도입해도 됩니까"를 묻고, 파일럿은 "7층 회의실 세 곳에서 2주만 써 봐도 됩니까"를 묻는다. 앞의 질문에 답하려면 결재권자가 미래를 알아야 하기에 많은 셈이 필요하지만, 뒤의 질문에는 그럴 필요가 없다. 끝에 "안 되면 엑셀 시트로 돌아갑니다" 한 줄이 붙어 있으면 더 그렇다. 돌아갈 길이 있다. 질문이 가벼우면 결재도 가볍다.

파일럿을 설계하는 데 필요한 것은 네 줄이다.

가설, 범위, 기간, 판단 기준. 예를 들면 이렇다.

  • 가설: 자율좌석제를 운영하면 팀 간 협업 빈도가 높아진다.

  • 범위: 7층 두 개 팀

  • 기간: 2주

  • 판단 기준: 주간 팀 간 미팅 횟수(캘린더 기록), 만족도 설문 3문항

이 네 줄이 있으면 2주 뒤에 결론이 나온다. 없으면 2주 뒤에도 "조금 더 지켜보자"가 나온다. 즉, 파일럿의 성패는 실행 이전에 판단 기준을 적어 두었느냐에서 갈린다. 여기에 안전핀 한 줄, 철회할 때 무엇을 원래대로 돌릴지를 붙이면 결재권자의 불안도 함께 줄어든다.

비품실에도 폼팩터가 있다

폼팩터 시프트는 소비재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총무가 제공하는 서비스에도 형태가 있다. 신청서의 형태, 비품실의 형태, 복지의 형태, 사무실의 형태. 원전이 제시한 세 가지 유형을 총무 업무에 대입해 보면 이렇다.

첫째, 물성의 변화다. 총무 서비스에서 물성은 손에 쥐는 재질이 아니다. 신청자가 체감하는 절차의 무게와 마찰이다. 비품 신청은 두 단계로 그 무게를 덜 수 있다. 1단계는 신청서를 가볍게 만드는 일이다. 양식을 내려받아 품목 코드와 사유를 적고 결재를 올리던 절차를 품목, 수량, 위치 세 칸짜리 간단한 신청서로 줄인다. 기능은 같다. 신청하고, 승인하고, 지급한다. 다만 신청자가 쓰는 시간과 총무가 취합하는 공수가 함께 줄어든다.

2단계는 신청 자체를 없애는 일이다. 볼펜, 포스트잇, 클립, 건전지처럼 단가가 낮고 자주 쓰는 비품은 층마다 미리 배치해 둔다. 필요한 사람은 신청하지 않고 가져다 쓴다. 총무는 건별 신청을 처리하는 대신 주 1회 소진량을 확인하고 채워 넣는다. 볼펜 한 자루를 받으려고 신청서를 쓰고 하루를 기다리던 경험이 사라지면, 구성원의 만족도는 비품 단가와 상관없이 올라간다. 볼펜은 같은 볼펜이다. 사라진 것은 신청서 한 장과 하루의 기다림뿐이다. 남는 과제는 어느 품목까지 사전 배치하고 어느 품목부터 신청을 받을지 기준을 정하는 일이다. 이 기준 역시 한 개 층에서 먼저 운영해 보며 정하면 된다.

둘째, 구조의 변화다. 비품실이 무인 보관함이 되고, 고정된 회의실이 가변 공간이 된다. 담당자가 자리를 지키며 열어 주던 비품실은 사원증을 대면 열리는 보관함으로 바뀐다. 누가 언제 무엇을 가져갔는지는 오히려 더 정확하게 남는다. 회의실, 교육장, 행사장을 따로 두던 공간은 가구와 칸막이를 옮겨 하나의 면적을 여러 용도로 쓰는 구조로 바꿀 수도 있다.

셋째, 행동의 변화다. 형태가 바뀌면 쓰는 방식이 달라진다. 전 직원에게 늘 같은 명절 선물을 돌리던 방식이 포인트 제공, 혹은 몇 가지 선물 중 고를 수 있는 형태로 바뀌면, 구성원은 받는 사람에서 고르는 사람이 된다. 모든 구성원이 한 건물로 출근하던 방식이 거점 오피스로 바뀌면, 총무가 관리하는 대상도 건물 하나에서 계약 여러 건으로 바뀐다.

이 가운데 새로운 기능은 하나도 없다. 전부 형태의 변화다. 그리고 전부 한 개 층, 한 개 팀, 한 분기로 잘라서 먼저 해 볼 수 있는 것들이다. 다만 형태를 바꾸는 것이 늘 정답은 아니다. 명절 선물을 선택형으로 바꾸면 "나는 이거 안 먹는데"라는 불만은 사라지지만, 회사가 직접 고른 선물이 전하던 메시지도 함께 사라진다. 그래서 파일럿이 필요하다. 해 보기 전에는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는지 알 수 없다.

실패도 기록하면 자산이다

파일럿의 진짜 산출물은 성공 여부가 아니다. 기록이다. 2주 뒤 자율좌석제가 실패했다고 가정하자. 그 실패에는 정보가 들어 있다. 어느 직군이 어떤 이유로 불편했는가? 어떤 자리가 쟁탈전의 대상이 되었는가? 모니터와 개인 짐은 어디에 두었는가? 이 정보가 2부에서 이야기한 의사결정 로그에 들어가면 다음 시도의 출발점이 된다. 기록 없는 실패는 그냥 실패다. 흔히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고 한다. 총무에게는 조금 다르다. 기록된 실패는 다음 파일럿의 시드머니다. 같은 머니기는하다.

팀을 운영하는 입장에서 한 가지 규칙을 권한다. 파일럿 보고서의 첫 줄은 결과가 아니라 "가설이 맞았는가"로 시작한다. 결과로 시작하는 보고서는 변명이 되기 쉽고, 가설로 시작하는 보고서는 학습이 된다. 보고서는 세 문장이면 충분하다. 가설은 맞았는가. 어떤 관찰이 그것을 보여 주었는가. 다음에 바꿔 볼 변수는 무엇인가. 그리고 실패한 파일럿을 보고한 팀원을 질책하지 않는다. 실패 보고가 불이익으로 돌아오는 팀에서는 누구도 먼저 시도해 보지 않는다. 결국 다시 석 달짜리 품의서로 돌아간다.

이것만은 조심

해봄경제를 "일단 저지르고 보라"로 읽으면 사고가 난다.

첫째, 일방향 문은 파일럿 대상이 아니다. 소방 설비, 전기 안전, 출입 보안, 임대차 계약은 해 보고 고치는 영역이 아니다. 이 영역에서는 석 달짜리 품의서가 옳다. 아니, 석 달도 짧을 수 있다. 충분히 심사숙고할 필요가 있다.

둘째, 커뮤니케이션이 중요하다. 파일럿에 참여하는 구성원은 실험 대상이 아니라 동료다. "여러분은 2주간 실험 대상입니다"라고 안내하면 결과가 왜곡된다. "먼저 써 보고 의견을 주실 분들"로 안내하고, 받은 의견을 실제로 반영한다면 만족도와 품질이 함께 올라간다.

셋째, 형태를 바꾼다는 것이 사람을 병목으로 보고 빼낸다는 뜻은 아니다. 무인 보관함이 들어온다고 해서 비품 담당자의 일이 사라지지 않는다. 재고 분석과 공급 업체 관리로 옮겨 간다. 폼팩터 시프트의 요점은 사람이 하던 일의 형태를 바꾸는 데 있다. 사람을 그 형태에서 지우는 데 있지 않다.

이번 주에 해볼 것

지금 팀에서 검토 중인 안건 하나를 고른다. 그 안건에 대해 품의서 대신 아래 표를 채운다.

항목

작성 내용

점검 질문

가설

무엇이 어떻게 달라질 것이라 보는가

한 문장으로 쓸 수 있는가

범위

어느 층, 어느 팀, 몇 명인가

실패해도 회사 전체가 흔들리지 않는가

기간

언제 시작해 언제 판단하는가

2~4주 안에 끝나는가

판단 기준

무엇을 보고 확대·수정·철회를 정하는가

시작 전에 숫자나 질문으로 적어 두었는가

되돌리기

철회할 때 무엇을 원래대로 돌리는가

원상 복구에 드는 비용을 알고 있는가

표를 채우는 데 10분이 넘게 걸린다면 아직 가설이 없는 것이다. 10분이 걸리지 않았다면 다음 주 월요일에 시작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2주 뒤, 이 표가 품의서의 첫 장이 된다.

다음 글 예고

4부의 주제는 선택이다. AI가 만든 비교표가 모두 비슷해질 때 총무의 판단은 어디에서 차이를 만드는지 다룬다. 해당 키워드는 휴먼엣지(Every AI Needs the Human Edge)와 안목자본(Power of Taste Capital)이다.


준용
최준용
총무, Safety&security, 사진 전문가
『다시 조직문화』 저자, 총무 외길 15년, 공간과 안전, 지식관리노하우를 나눕니다

댓글0

댓글이 없습니다.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
(주)오프피스트 | 대표이사 윤용운
서울특별시 서초구 사임당로8길 13, 4층 402-엘179호(서초동, 제일빌딩)
사업자등록번호: 347-87-03493 |
통신판매업신고번호: 제2025-서울서초-2362호
전화: 02-6339-1015 | 이메일: help@offpiste.a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