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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열하게 살았는데 왜 뭉툭할까

치열하게 살았는데 왜 뭉툭할까

비슷비슷한 스펙과 경험의 동질화와 '뾰족함'과 차별화된 무기의 필요성
채용주니어취업준비생신입/인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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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odwonMar 26,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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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입 채용을 열었더니, 내가 더 막막해졌다.

최근 신입 인턴 공채를 열었다. 오랜만의 신입 채용이라 내심 기대가 컸다. 솔직히 우리 회사가 취준생들 사이에서 이름만 대면 알 만한 핫한 곳도 아닌데. 모여든 이력서에 적힌 스펙들을 보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취업 시장이 빙하기라는 말은 매일 뉴스에서 봤지만, 현장에서 체감하는 온도는 그보다 훨씬 차가웠다.

얼마 전 HR 담당자들끼리 모인 네트워킹 자리에서 오갔던 흉흉한 이야기들이 떠올랐다. 누군가는 퇴사자 자리에 사람을 뽑는 대신 AI 에이전트를 만들어서 활용하라는 전사 지시가 있었다고 헀다. 육아휴직을 마치고 돌아오니 부서원이 반토막 나 있더라는 서늘한 실화도 돌았다. 그때만 해도 남의 집 불구경하듯 고개만 끄덕였는데, 막상 신입 이력서 더미를 마주하니 그 이야기들이 뒤늦게 피부에 닿았다.

서류만 봤을 때, 당장 실무에 투입해도 손색없을, 아니 오히려 우리 회사에 오기엔 과분하다 싶은 고스펙자들이 수두룩했다. 모니터를 스크롤하며 속으로는 '이 친구들이 와서 금방 도망가지 않고 버텨줄까' 하는 쓸데없는 걱정까지 했다.

그런데 면접실 문이 열리고 대화가 깊어질수록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지원자의 절반 정도는 이미 다른 회사에서 계약직이든 인턴이든 HR 업무를 맛본 상태였다. 나보다 훨씬 젊고 트렌드에 민감한 세대니, GPT를 비롯한 AI 툴을 업무에 적극적으로 써봤다는 이야기를 들려줄 거라 내심 기대했다. 내 기대가 너무 순진했던 걸까.

자기소개서의 문법부터 포트폴리오의 구성, 심지어 면접관의 눈을 마주하며 내놓는 모범 답안의 결까지. 10여 년 전 내가 취업 준비를 하던 시절, 혹은 처음 신입 채용 실무를 맡았던 주니어 시절 봤던 풍경과 놀라울 정도로 다르지 않았다.

물론 이번 채용이 HR 인턴에 국한된 케이스일 수도 있다. 마케터나 디자이너, 개발 쪽은 생태계가 완전히 다르게 돌아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요즘 취준생 전체를 섣불리 재단하고 싶진 않다. 하지만 적어도 내 눈앞에 앉은 이 똑똑하고 성실한 청년들의 무기는 생각보다 뭉툭했다. 직무와 관련된 자격증 몇 가지, 그리고 현장에서 몇 달간 경험을 쌓은 인턴십 기록 정도였다.

그 인턴 경험이라는 것도 찬찬히 뜯어보면 입맛이 좀 쓰다.

HR 유경험자 중 80% 이상이 실무에서 채용 운영 업무를 하다 왔다. 보지 않아도 그림이 그려진다. 면접 일정 조율하고, 안내 메일 돌리고, 엑셀 데이터 정합성 맞추고. 사내에 굳이 내재화할 필요는 없지만 누군가의 손발은 갈아 넣어야 하는 단순 반복 업무들. 기업들은 그런 자리에 인턴들을 소모품처럼 꽂아 넣는다.

좀 꼰대 같은 소리일지 모르겠는데, 내가 취업문을 두드릴 때만 해도 '채용 전제형 인턴'이 꽤 많았다. 요즘은 이른바 '체험형'이라는 그럴싸한 포장지를 씌운 단기 아르바이트가 그 자리를 차지해 버렸다. 기업들은 귀한 실무 경험을 제공한다며 은근히 생색을 내고, 취준생들은 이력서의 빈칸을 채우기 위해 무조건적인 을을 자처한다. 채용이라는 운동장은 이전보다 훨씬 가파르게 기울어져 있는 것 같았다.

경력직 시장이야 알아서 전문가들을 찾아 모시는 아웃바운드 채용이 활성화되고 있다지만, 신입들의 세상은 정반대다. 예나 지금이나, 아니 지금이 더 철저하게 회사가 갑인 세상.

이쯤 되니 면접관인 내가 다 막막해진다. 채용 문은 바늘구멍인데, 고만고만한 인턴 몇 번과 자격증 몇 개가 수백 명의 클론 같은 지원자들 사이에서 자신을 증명하는 무기가 될 수 있을까.

비슷비슷한 스펙의 늪에서 눈에 띄려면 결국 나만의 '뾰족함'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남들이 다 하는 뻔한 채용 운영 인턴십을 했더라도, 그 안에서 엑셀 수작업을 자동화해 보려 발버둥 쳤다거나, AI를 써서 업무 시간을 절반으로 줄여봤다거나. 그 아주 작고 날카로운 시도 하나.

면접을 마치고 회의실에 남아 이력서들을 다시 넘겨봤다. 다들 참 치열하게 살았는데. 종이 위에 적힌 스펙의 무게에 비해, 그들의 진짜 무기는 왜 이리 뭉툭하게 느껴지는 걸까. 쓸쓸한 마음을 안은 채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쩌면 이 지독한 빙하기를 뚫어내는 건, 가장 무거운 스펙을 짊어진 사람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스펙보다 조금 더 선명하게, 자기만의 방식으로 살아남은 흔적을 가진 사람. 그 뾰족한 한 줄이, 이 두꺼운 이력서 더미에서 고개를 드는 유일한 방법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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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odwon
12년차 인사 제네럴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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