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내게 지금까지 해온 일 가운데 가장 잘한 선택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주저 없이 ‘장애가 커리어가 되는 직업을 만드는데 시간과 열정을 쏟은 것’이라고 답할 것이다. 지금까지 장애인 고용은 ‘장애인도 할 수 있는 일’을 찾는 방식이었다. 존재하는 직무를 나열해 그중 장애인도 할 수 있는 업무를 선정하거나, 비장애인 입장에서 비효율적이고 귀찮고 체면 깎이는 잡무들이 ‘장애인을 위한 일’로 포장되어 왔다. 사실 이 과정에는 ‘비장애인이 만들어 놓은 세상 속에서 영구적으로 일상의 불편함을 가진 사람이 알아서 적응해라. 이것도 고맙게 여겨라’는 상당히 폭력적인 시선과 메시지가 내포되어 있다.
면접 기회조차 갖지 못하는 고용 생태계에서 물론 필요한 접근이다. 하지만 나는 인사(HR)의 본질로 돌아가 질문해 보고 싶었다. 장애에도 불구하고 할 수 있는 일을 넘어, ‘장애를 경험했기 때문에 더 잘할 수 있는 일’은 없을까. 문자 그대로 ‘장애로 살아온 과정’이 비장애인 구직자와 비교했을 때 이들이 가진 ‘커리어’이자 경쟁력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 나는 검증을 위한 작은 실험을 했고, 실험의 무대가 된 분야가 바로 ‘유니버설 디자인’이었다.
※ 유니버설 디자인 (Universal Design)
성별, 연력, 국적, 언어, 문화적 배경, 장애 유무에 상관없이 누구가 손쉽게 쓸 수 있는 제품, 환경, 서비스 등을 디자인 하는 것
기업은 ‘장애인’을 사회적 약자나 배려의 대상으로 바라보기 쉽다. 하지만 이들이 바이럴 마케팅의 핵심인 빅마우스이자, 까다롭지만 한번 신뢰를 얻으면 충성 고객이 되기 쉬운 잠재고객이라면 어떨까. 시혜적인 시선에서 벗어나 고객으로 관점을 바꾸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장애인은 기업의 제품과 서비스가 어디에서 불편한지를 누구보다 구체적으로 경험해온 사용자이자, 어떤 포인트를 개선하면 가장 매력적인 서비스가 되는지를 정확히 간파하고 있는 전문가이다.
특히 시각장애인은 정보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을 때 어떤 문제가 생기는지, 어떤 위험이 예상되는지를 일상에서 반복적으로 경험한다. 음식점 메뉴판을 읽지 못하고, 키오스크를 사용할 수 없고, 이미지로만 제공되는 정보를 이해하지 못하며, 안내 표지의 작은 차이 때문에 이동에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경험을 단순한 불편으로 남겨두는 것이 아니라 전문성으로 전환할 수 있지 않을까. 시각장애인 고객이 편하고 안전하게 사용할 수 있다면 어르신도, 언어를 모르는 이들에게도 동일한 서비스 경험이 전달되지 않을까. 장애인으로 살아온 이들의 지난 시간들이 ‘커리어’이자 ‘인사이트’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나는 빛조차 감지할 수 없는 전맹과 잔존 시력이 남아 있는 저시력 시각장애인 네 명을 ‘유니버설 디자인 컨설턴트’로 양성했다. 단순히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당사자가 아니라 공간과 정보, 제품과 서비스의 접근성을 체계적으로 점검하고 기업과 기관에 개선안을 제시할 수 있는 전문가로 성장시키는 것이 목표였다. 1년의 사업 준비와 컨설턴트 양성 과정을 거쳐, 유니버설 디자인 교육·컨설팅 브랜드 ‘유디큐브(UD Cube)’를 만들고 학교, 지자체, 기업을 대상으로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다양한 전공의 대학생들과 산학협력 프로그램을 운영하면서 시각장애인 컨설턴트들이 직접 접근성 문제를 설명하고, 함께 제품과 서비스를 분석하며 잠재시장 발굴 전략을 구체화했다. 장애인 당사자가 사회적 약자, 불편을 감내하는 소수 고객에서 제품과 서비스의 기획 방향을 제시하고,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육자이자 전문가로 역할이 역전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흥미로운 변화가 나타났다. 학생들은 장애인을 위해 무엇을 ‘해주는’ 방법보다 장애인과 함께 문제를 발견하는 방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당사자의 경험이 이론이나 교재만으로는 얻기 어려운 전문적인 정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비교과 프로그램으로 시작하여 이후 대학의 정규 교과과정으로 확장되었고, 지자체의 유니버설 디자인 가이드라인 수립과 현장 컨설팅으로도 이어졌다.
내게 특히 의미가 컸던 순간은 장애인 컨설턴트들과 함께 수행한 지역 프로젝트가 좋은 평가를 받아 시장님으로부터 감사패를 받았을 때였다. 장애인을 돕기 때문에 받은 평가가 아니었다. 실제로 필요한 전문 서비스를 제공했고, 고객이 그 결과에 만족했기 때문에 받은 평가였다. ‘장애가 커리어가 될 수 있다’는 가설을 증명한 것이다.

[참고] 한양대, 유니버설 디자인 활용 융합 산학협력 성과 발표
[참고] 포항시, 세계미식도시 ESG 모델 외식업계 환대 기준 재정립
그러나 장애인의 경험이 특별하다고 해서 곧바로 직업이 되는 것은 아니다. 직업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세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먼저 전문성을 가진 사람이 있어야 하고, 그 전문성으로 해결할 문제(고객의 불편 포함)가 있어야 하며,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비용을 지불할 고객이 있어야 한다. 좋은 취지만으로는 지속가능한 일자리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장애인 직무개발은 복지 프로그램을 만드는 일이라기보다 새로운 시장을 설계하는 일에 가깝다. 비용을 지불하는 기업과 기관, 문제를 해결하는 서비스, 당사자성을 전문성으로 발전시킨 장애인 직원이 서로 연결될 때 비로소 하나의 직업이 만들어진다.
또한 장애인 고용은 정책의 사각지대를 보완하는 대안이 될 수 있다. 시각장애는 안질환의 특성상 10대부터 발병해 수년에 걸쳐 천천히 진행된다. 이 과정에서 시각장애로 학업과 일상이 멈췄지만 까다로운 장애인 등록 기준으로 인해 복지·교육·취업 지원에서 배제된 청년이 약 30만 명으로 추정된다. 장애인 등록증을 갖지 못한 이들은 여전히 ‘비장애인 청년’인 것이다. 제도 밖에서 장기간 방치될 경우 은둔·고립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크다는 의미다. 나는 이 문제 역시 ‘그 과정을 겪어온 당사자에게 해결책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2030세대는 전체 커리어 방향과 기초 역량을 다져야 할 골든타임인데, 사각지대라는 이유로 방치되는 것에 문제의식을 느꼈다. 그리고 동일한 방식으로 ‘장애가 커리어가 되는 직무’를 만들었다. ‘사각지대 중증 시각장애 청년 환자’를 위한 조기 자립훈련 모델을 개발한 것이다.
안질환으로 중도 시각장애인이 된 선배 시각장애인 강사가 ‘눈이 아닌 귀로 세상을 읽는 법(모바일 접근성 훈련)’을 알려주고, 장애인 등록증이 없어 복지관에 가지 못하더라도 민간에서 언제든 필요한 보행 훈련과 심리·진로 멘토링을 제공함으로써 사회생활의 기초 역량을 체계적으로 준비할 수 있도록 도왔다. 이는 정책의 공백을 보완하는 동시에 장애가 커리어를 넘어 이들에게 사명이 될 수 있음을 확인한 시간이었다.
그럼 이 직무는 어디에 놓아야 가장 시너지가 날까. 개인적으로 교육부 또는 지자체별 교육청에서 거점별 모바일 접근성 장애인 강사를 양성해 지역의 사각지대를 해소하고, 동시에 장애인 일자리가 더 의미있게 쓰이도록 설계해 보면 어떨까라는 기대를 가져본다. 2026년 기준 공공부문의 장애인 의무고용률 기준선은 3.8%이다. 하지만 정작 모범이 되어야 하는 공공은 매년 고용률 미달에 그치고 있다. 이 글이 부디 교육계에 닿아 장애인 고용의 새로운 패러다임이 열리길 소망해 본다.
사각지대 문제는 기업에게도 기회이다. ESG 전략 사업으로 명분도 성과도 모두 챙길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공교육, 사교육 시장을 꽉 잡고 있는 출판사나 교육 기업에게 더 없이 좋은 아이템이다. 우리의 교재와 서비스를 이용하는 고객들에게 긍정적인 평판은 물론, 우리 사업의 본질을 임직원 모두가 다시금 되새겨 직무만족도와 조직 충성도를 높이는 전략으로도 탁월한 대안이 될 것이다.
여기서도 중요한 것은 장애를 없애주는 것이 아니었다. 장애가 있는 상태에서도 다시 학교로 돌아가고, 사람을 만나고, 자신의 삶과 진로를 선택할 수 있도록 필요한 역량을 먼저 만드는 것이었다. 그리고 누군가의 장애 경험은 또 다른 누군가의 시행착오를 줄이는 전문성이 되었다.
이런 경험을 거치며 나는 장애인 직무개발을 조금 다르게 정의하게 되었다. 장애인에게 기존 일자리를 나눠주는 것이 아니라 아직 직업이라는 이름을 얻지 못한 경험과 역량을 발견해 시장과 연결하는 일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또 하나의 가능성이 생긴다. 사람이 직무의 모든 요구조건을 충족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기술이 사람이 일하기 어려운 부분을 보완한다면 어떨까. AI가 사람의 일을 빼앗는 기술이 아니라 지금까지 일할 수 없었던 사람에게 새로운 직무의 문을 열어주는 기술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다음 글에서는 실제 기업 현장에서 확인한 그 가능성을 이야기해 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