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달 전, 한 기사의 제목이 마음에 오래 남았습니다.
"나만의 노하우인데 왜 공유하나… AI 프롬프트 거절한 신입에 온라인 갑론을박."
AI를 잘 다루는 어느 신입사원이 퇴근하고 따로 공부하면서 쌓은 자신의 노하우라고 자신이 만든 프롬프트를 팀장에게 알려 주기를 거절했고, 그 장면을 두고 온라인에서는 뜨거운 논쟁이 벌어졌다는 이야기였습니다. "퇴사할 때 내 기억도 지워야 하느냐"는 반문부터, AI 시대의 저작물 소유권을 둘러싼 분쟁까지.
몇 줄의 문장을 나누느냐 마느냐가, 이제는 한 사회의 화두가 된 것입니다.
저는 그 논쟁 앞에서 한참을 멈춰 생각에 빠졌습니다. 대단한 영업 비밀도 아니고 몇 줄의 문장일 뿐인데, 우리는 왜 이토록 나누고, 공유하기를 주저하게 되었을까요. 우리는 지금 공유가 곧 힘이 되는 도구를 손에 쥐고, 정작 공유하지 않는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한때 우리 사회의 화두는 '공유경제'였습니다. 소유에서 나눔으로, 내 것에서 우리 것으로.
지금도 '당근'이라는 플랫폼에서 이웃과 물건을 나누고, 함께할 크루를 모으는 문화가 우리 곁에 살아 있습니다. 그런데 기술이 가장 진보했다는 이 AI의 시대에, 우리의 마음은 오히려 뒤로 걸어가고 있습니다. 공유의 경제를 외치던 손이, 이제는 나의 노하우를 움켜쥐는 손으로 바뀌어 가고 있습니다.
이 흐름은 개인의 책상 위에서만 벌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글로벌을 외치던 나라들이 앞다투어 자국 우선주의로 돌아섰고, 시장은 점점 더 폐쇄적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바로 그 폐쇄의 한복판에서 정반대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는 사실입니다.
마크 저커버그는 최근 6,500단어에 달하는 에세이 <모두를 위한 미래(The Future is for Everyone)>에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초지능이 소수의 기관에 집중되고 제한될 것인가, 아니면 모두를 힘 있게 하는 도구가 될 것인가." 그는 "안전한 길이 오직 권력의 극단적 집중뿐이라는 발상은 본질적으로 문제가 있다"며, 초지능을 소수에 가두지 말고 널리 분산시켜 모두가 통제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같은 시기, 구글 딥마인드에서는 27년을 몸담은 전설적 과학자 제프 딘이 동료들과 함께 회사를 떠나 '디스커버리 루프'라는 공익법인(PBC)을 세웠습니다. 그는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회사의 순수한 재무적 이익에 반드시 부합하지는 않는 결정을 내릴 수도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미 많은 것을 이룬 이가, 이제는 자기 배를 부르게 하는 일이 아니라 인류 전체를 위한 과학적 발견에 남은 시간을 쓰겠다고 선언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들이 성인군자여서가 아닐 것입니다. 거기에는 기업의 계산도, 시장의 논리도 깔려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선언들에서 한 가지 공통된 질문을 읽습니다."이 거대한 힘을, 나만을 위해 쓸 것인가, 우리를 위해 쓸 것인가." 세계 최고의 자리에 선 이들조차 스스로에게 던지고 있는 이 질문을, 정작 우리는 프롬프트 몇 줄 앞에서 잊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종말과 재난을 다룬 영화의 결말은 신기하리만치 똑같습니다. 나만 살겠다고 발버둥치는 사람, 남이 어떻게 되든 내 살길만 찾는 사람은 끝내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리고 인류는,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내어놓은 누군가의 희생 위에서 다시 새로운 아침을 맞습니다. 영화가 반복해서 이러한 결말을 보여 주는 이유는, 그것이 이야기의 공식이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오래도록 붙들고 싶은 진실이라고 믿기 때문일 것입니다.
인간은 함께할 때 시너지를 냅니다. 특히 관계로 살아온 우리 대한민국 민족은 더욱 그렇습니다.
열 사람이 각자 하나씩을 만들면 열이지만, 함께 만들면 열 배가 됩니다. 그것이 우리가 오랫동안 증명해 온 '우리'의 힘입니다. 그런데 AI라는 가장 강력한 협업의 도구를 손에 쥔 지금, 우리는 역설적으로 가장 외롭게 일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됩니다.
넷플릭스 시리즈 <참교육>이 몇달 전까지 여러 나라에서 비영어 부문 글로벌 1위에 오른 것은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 작품은 무너진 교실, 곪아 버린 자리, 아무도 손대지 않으려던 썩은 부분을 정면으로 드러냈습니다. 그리고 시청자들은 "흔들리는 현실 속에서도 끝내 우리가 지켜내야 할 가치는 무엇인가"라는 묵직한 질문에 공감했습니다. 다만 이 드라마가 던진 '참교육'이라는 단어에는 씁쓸한 이면도 있습니다.
본래 학생의 인격을 존중하는 '참된 교육'을 뜻하던 이 말은, 언젠가부터 누군가를 거칠게 응징하는 '사이다식 처벌'의 은어로 변질되었습니다. 저는 우리가 되찾아야 할 참교육이 후자가 아니라 전자라고 믿습니다. 주먹으로 굴복시키는 참교육이 아니라, 무너진 자리에 다시 사람을 세우고 방향을 가리키는 참교육 말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이다처럼 시원하게 누군가를 응징하는 어른이 아닙니다. 곪은 곳을 정직하게 드러내되, 그 자리에 다시 '우리'를 세우는 어른입니다. 먼저 이 시대를 살아 본 사람으로서, 권리보다 책임을 먼저 말할 줄 아는 어른입니다.
이 시대의 참된 어른은 거창한 선언으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저는 그것이 아주 작고 구체적인 태도의 전환에서 시작된다고 믿습니다.
첫째, 나의 프롬프트를 여십시오. 내가 찾아낸 방법, 내가 아껴 온 노하우를 먼저 나누는 사람이 되십시오.
지식을 움켜쥐면 나 한 사람만큼 강해지지만, 나누면 조직 전체가 강해집니다. 저커버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한 사람만 강력한 도구를 가지면 격차가 생기지만 모두가 가지면 그 격차가 사라집니다.
공유는 손해가 아니라, 가장 확실한 조직의 투자입니다.
둘째, 권리를 따지기 전에 책임을 먼저 물으십시오. "회사가 나에게 무엇을 해 주었는가"라는 질문도 필요하지만, 지금 이 순간 더 절박한 질문은 "나는, 우리 조직은, 이 공동체에 어떤 책임을 다하고 있는가"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권리와 책임의 무게가 뒤바뀐, 가장 중요한 분기점을 지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셋째, AI를 '나를 편하게 하는 도구'가 아니라 '우리를 크게 하는 도구'로 쓰십시오. 생산적인 일은 전부 AI에게 맡기고 인간은 소비만 하면 된다는 미래를, 저는 믿지 않습니다. 도구가 강력해질수록, 그것을 어디에 쓸 것인가를 정하는 인간의 방향 감각이 더 중요해집니다. AI가 발명과 창조의 도구가 될지, 아니면 각자의 안락을 위한 무기로 남을지는 결국 그것을 쥔 사람의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이 질문 앞에서 저는 조심스럽지만 분명하게 대답하고 싶습니다.
될 수 있다고. 다만, 저절로 되지는 않습니다.
기술은 중립적입니다. AI는 인류의 공동체를 해체하는 도구가 될 수도, 모두를 힘 있게 하는 도구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 갈림길에서 방향을 정하는 것은 결국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방향을 먼저 가리켜야 하는 사람이 바로, 이 시대를 한 발 앞서 살고 있는 우리 어른들입니다.
프롬프트 한 줄을 나누는 손, 권리보다 책임을 먼저 묻는 마음, 나의 안락보다 우리의 미래를 먼저 생각하는 시선. 그 작은 것들이 모여 '우리'가 됩니다. 이 시대에 정말 필요한 참교육은, 누군가를 응징하는 통쾌함이 아니라, 무너진 자리에 다시 사람과 사람 사이의 다리를 놓는 일입니다. 그 다리를 먼저 놓는 사람이, 이 시대의 참된 어른이고 리더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