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 정체성이라는 말이 있다.
심리학적으로는 '나는 선수다'라는 자기 동일시, 그리고 '운동이 내 삶의 전부라고 믿는 정도'를 의미한다(Brewer et al., 1993).
운동 정체성이 강한 선수는 힘든 훈련도 잘 버틴다. 새벽 5시에 일어나 러닝 트랙을 돌고, 수십 번 반복하는 스프린트와 웨이트 트레이닝, 경기 전날까지 이어지는 전술 훈련 속에서도 끝까지 해내는 힘의 원천이 바로 ‘나는 선수다’라는 믿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경기 도중 치명적인 실수를 하고도 고개를 푹 숙이고 눈치를 보기보다는 몇 분 만에 다시 전력 질주로 돌아오는 힘 역시 ‘운동 정체성’이 강할 때 나온다.
그러나 문제는, 오직 ‘선수라는 한 가지 정체성에만 의존’할 때이다. 부상으로 경기장에 설 수 없거나, 은퇴로 인해 선수라는 자리가 사라지는 순간 혼란은 극에 달한다.
반대로 선수로서의 역할이 줄어든 뒤에도 ‘팀을 위해 지원하는 사람’, ‘새로운 길을 배우는 사람’이라는 다른 정체성을 지니고 있던 선수는 달랐다. 그는 은퇴 이후에도 지도자, 행정가, 해설 위원 등으로 자연스럽게 역할을 옮길 수 있었다.
운동선수에게 정체성이 몰입의 힘이면서 동시에, 위험 신호가 되듯, 회사에서도 똑같은 패턴이 반복된다. '나는 이 회사의 리더다', '나는 영업 전문가다' 등 하나의 정체성 만으로 자신을 설명하는 사람은 성과가 좋을 때는 누구보다 빛나지만, 환경이 변하면 가장 먼저 흔들릴 수 있다.
외국계 기업에서 오랫동안 ‘세일즈 에이스’로 불리던 직원이 있었다. 그는 매출 1위를 수년 간 놓치지 않았고, 스스로도 '나는 뼛속까지 영업인이다'라고 정의했다.
그러나 시장 환경이 바뀌고 실적이 흔들리자, 그는 급격히 무너졌다.성과가 곧 존재의 이유였기 때문에, 매출이 떨어지자 자신이 무가치하다고 느낀 것이다.
반면 같은 회사의 또 다른 직원은 달랐다. 그는 자신을 '매출을 만드는 영업인'일 뿐만 아니라,
'후배를 성장 시키는 멘토', '새로운 시장을 탐구하는 학습자'라고 여겼다.
실적이 기대에 못 미쳤을 때조차, 후배를 지도하고 신사업 아이디어를 제안하며 팀에 기여했다.
그의 리더십은 성과에서만 나온 것이 아니라, 여러 정체성에서 비롯된 안정감에서 비롯되었다.
비슷한 이야기는 다른 직무에서도 나타난다.
IT 기업의 한 개발자는 자기 자신을 '코드 짜는 사람'에만 가둬 두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를 '팀이 마주한 문제를 해결하는 협력자'이자'사용자 경험을 고민하는 프로그래머'라는 정체성을 함께 가지고 있었다.
덕분에 크고 작은 조직 변화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새로운 리더십 기회까지 얻게 되었다.
스포츠와 조직이 주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단일한 정체성은 몰입을 주지만, 동시에 큰 위험을 안긴다.
리더십은 한 가지 역할에 몰입하는 힘이 아니라, 여러 정체성을 함께 키우는 균형 속에서 나온다.
나는 선수이면서 동시에, 배우고 성장하는 학습자이고, 동료의 성공을 돕는 팀의 구성원이자, 미래를 준비하는 한 개인일 수도 있다. 운동 정체성은 다른 정체성과 함께 설 때 오히려 더 단단해진다. 그리고 그래야 선수로서, 직장인으로서의 존재감도 더 단단하고 오래 이어질 수 있다.
조직도 마찬가지다. 직장에서 '나는 관리자다', '나는 성과를 내는 영업인이다'라는 단 하나의 정체성만 붙잡으면, 성과가 흔들리거나 자리가 바뀔 때 존재 자체가 흔들릴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을 새로운 기술과 지식을 배우는 직원, 후배와 동료를 성장 시키는 멘토,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하는 탐구자라고 정의하는 사람은 다르다. 변화와 위기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오히려 리더십과 업무의 기회를 넓혀간다. 결국 우리는 어떤 직함을 갖고 있느냐보다, 내가 어떤 정체성들을 함께 키워가고 있느냐에 달려 있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나는 지금 어떤 정체성들을 함께 키워가고 있는가?
나는 지금 누구인가-를 물으며 동시에 또 다른 나의 이름표는 무엇일지 함께 고민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The Other Game은 스포츠 씬 속 리더십과 마인드셋을 연구합니다.
본게임 너머, 경기장 밖의 ‘또 다른 게임’을 다루는 방식이 개인과 팀의 성장을 결정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