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연이 아닌 능력을 택한 리더, 테무진

혈연이 아닌 능력을 택한 리더, 테무진

人事萬史 : 칭기즈칸, 씨족에서 제국으로 ②
리더십임원CEO
영준
유영준Sep 6, 2026
302

0. 초원 앞에서

12세기 후반 몽골 초원에서 사람의 출신은 단순한 이력 한 줄이 아니었다. 어느 집안에서 태어났는지는 누구와 혼인할 수 있는지, 누구의 보호를 받을 수 있는지, 전쟁이 벌어졌을 때 누구와 함께 싸워야 하는지를 결정했다. 유력한 혈통은 그 자체로 정치적 자산이었고 친족과 혼인관계는 세력을 묶는 가장 오래되고 강한 방법 가운데 하나였다.

테무진 역시 이런 질서 밖에서 등장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보르지긴 계통의 후손이었고 아버지 예수게이의 이름을 이용했으며 ‘옹 칸’이라 불린 케레이트의 토그릴에게 접근할 때도 아버지와 토그릴 사이의 관계를 근거로 삼았다. 보르테와의 혼인은 옹기라트계와의 연결을 만들었고 훗날 자녀들의 혼인 역시 정치의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 심지어 훗날 최대의 숙적으로 자리잡는 자무카는 그의 안다, 즉 가족보다 끈끈한 의형제였다.

따라서 테무진을 ‘혈통을 폐지하고 능력주의를 도입한 혁명가’처럼 그리는 것은 실제 역사와 거리가 있다. 그가 살아간 세상에서 혈연과 가문은 끝까지 중요했고 칭기즈 칸 이후에는 오히려 그의 혈통 자체가 제국 통치의 가장 강력한 정당성이 되었다.

그런데 테무진의 성장 과정에는 당시의 기존 질서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사람들이 계속 나타난다. 그의 형제도 아니고 유력한 친족도 아니었던 사람들이 중요한 일을 맡고 점차 조직의 중심으로 이동했다.

사람을 고르는 기준에 다른 것이 하나씩 더해지기 시작했다.

1. 우리 회사는

창업한 지 십 년 된 제조기업이 있다. 직원은 이제 마흔 명이 넘었지만 주요 자리는 여전히 창업 초기 사람들에게 돌아가 있다. 영업팀장은 대표의 대학 동기이고 관리부장은 대표의 처남이며 생산 책임자는 회사를 세울 때부터 함께했던 직원이다. 회사가 어려웠던 시절을 같이 버틴 사람들이니 대표가 이들을 신뢰하는 데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문제는 회사가 달라졌다는 데 있다. 예전에는 대표가 직접 영업하고 생산현장을 돌아다니면 됐지만 지금은 해외 고객과 품질인증, 원가관리와 신규제품 개발까지 동시에 다뤄야 한다. 외부에서 경력직도 들어오기 시작했고 그중에는 기존 팀장보다 특정 분야를 훨씬 잘 아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자리가 생길 때마다 대표의 마음은 익숙한 사람에게 먼저 간다.

“그래도 오래 같이 해봤으니까.”

틀린 판단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능력이 뛰어나도 믿을 수 없는 사람에게 조직을 맡기는 것은 위험하다. 반대로 오랫동안 함께했다는 사실만으로 앞으로 필요한 역할까지 잘할 것이라고 볼 수도 없다.

조직이 작을 때에는 ‘누구를 믿느냐’가 사람을 선택하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 조직이 커지면 여기에 다른 질문이 붙는다.

‘누가 이 일을 가장 잘할 수 있는가.’

이제 자리잡아 가는 테무진의 세력도 비슷한 경계를 지나고 있었다.

2. 자기 사람이 늘어나기 시작하다

보오르추와 젤메처럼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테무진 곁에 있던 사람들은 단순한 병사가 아니었다. 『몽골비사』가 전하는 서사에서 이들은 테무진이 아직 강력한 군주가 아니었을 때부터 그와 행동을 함께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테무진에게는 이들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가족도 있었다. 동생 카사르와 카치운, 테무게가 있었고 이복동생 벨구테이도 있었다. 사촌과 방계 친족들도 정치적 세력으로 존재했다. 테무진의 초기 세력은 오늘날 회사처럼 조직도를 먼저 그리고 사람을 채워 넣은 집단이 아니라 가족과 친족, 노코르와 동맹세력이 여러 층으로 겹쳐 있는 정치적 관계망이었다.

1180년대 무렵으로 추정되는 훗날의 시기, 테무진이 몽골계 여러 지도자들로부터 칸으로 추대되는 장면에서도 이런 복합적인 모습이 드러난다. 『몽골비사』에는 알탄, 쿠차르, 사차 베키 같은 유력한 친족 계통의 인물들이 테무진을 칸으로 세우는 과정이 나온다. 그의 개인적 능력만으로 왕좌가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기존 귀족 가문들의 동의와 정치적 이해관계가 필요했다.

테무진은 아직 옹 칸이나 자무카보다 압도적으로 강하지 않았다. 오히려 여러 세력 사이에서 자신의 기반을 만들어가던 단계였다. 삼국지로 따지면 제갈량을 얻기 전의 유비 정도의 모습이다.

그런 상황에서 사람을 무조건 출신만 보고 쓸 수도 없었고 반대로 기존 귀족과 친족을 모두 밀어내고 새 사람만 쓸 수도 없었다. 전자는 성장의 범위를 제한했고 후자는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일이었다. 테무진은 두 종류의 관계를 함께 가지고 가기 시작했다.

3. 오래된 관계가 자리를 보장하지는 않았다

테무진과 가까운 혈연이라고 해서 언제나 관계가 좋았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의 성장 과정에는 친족과의 충돌이 반복된다.

주르킨과의 갈등이 대표적이다. 주르킨은 테무진과 같은 보르지긴계의 유력한 친족 집단이었다. 『몽골비사』에서는 잔치에서 벌어진 다툼과 이후의 군사행동을 거치며 양측 관계가 악화되는 과정이 묘사된다. 결국 테무진은 주르킨을 공격했고 그 지도층을 제거했다. 세부 경위를 얼마나 그대로 받아들일 것인지는 신중해야 하지만 적어도 같은 혈통이라는 사실이 정치적 충돌을 막아주지는 못했다. 하긴 이복형인 벡테르를 죽인 테무진에게 주르킨과의 갈등은 그저 남일 정도였을 지도 모르곘다.

또 다른 친족과의 관계에서도 비슷한 모습이 나타났다. 테무진을 칸으로 추대한 유력 친족들이 훗날 항상 그의 곁을 지킨 것도 아니었다. 초원의 정치에서 오늘의 동맹이 내일의 경쟁자가 되는 일은 드물지 않았다.

반대로 혈연이 아닌 사람들의 역할은 점차 커졌다.

보오르추는 아룰라트 출신이었고 젤메는 우리앙카이(우량카이)계 출신으로 전해진다. 훗날 테무진의 가장 중요한 지휘관 가운데 한 사람이 되는 무칼리도 그의 형제나 가까운 친족이 아니었다. 제베 역시 처음부터 테무진의 사람이 아니었고 수부타이 역시 칭기즈 가문의 구성원이 아니었다.

이들이 모두 같은 방식으로 발탁된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은 일찍부터 테무진을 따랐고 어떤 사람은 다른 집단에서 넘어왔으며 어떤 사람은 전쟁과 복속 과정에서 들어왔다. 출신과 합류 경로는 서로 달랐다. 중요한 것은 테무진이 자기 친족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이들의 역할에 일정한 천장을 만들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4. 충성만으로도 부족했다

그렇다고 테무진이 사람의 ‘능력’만 보았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초원의 정치에서 충성은 생존과 직결됐다. 전투 중 다른 편으로 넘어갈 수 있고 지도자의 세력이 약해지면 사람들이 집단으로 이탈하던 시대였다. 뛰어난 전사라도 중요한 순간에 누구 편에 설지 알 수 없다면 가까이 두기 어려웠다.

테무진이 사람을 대하는 장면에는 그래서 능력뿐 아니라 행동의 일관성을 중시한 흔적이 보인다. 『몽골비사』에는 나야아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그는 자신의 주군이었던 타이치우드의 지도자 타르구타이 키릴투크를 붙잡아 테무진에게 데려가려다가 주군을 배신한 사람이라는 비난을 받을 것을 염려해 결국 풀어주고 테무진에게 찾아갔다고 전해진다. 테무진은 오히려 그가 옛 주군을 함부로 배신하지 않은 행동을 높이 평가했고 훗날 중요한 역할을 맡겼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역시 『몽골비사』가 이상적인 충성 규범을 보여주기 위해 서사를 다듬었을 가능성을 고려해야 한다. 그러나 어떤 행동이 몽골 지배층에게 가치 있는 것으로 기억되었는지는 보여준다. 테무진에게 필요한 사람은 단순히 싸움을 잘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면서도 관계의 규칙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다.

여기에는 현대의 ‘역량평가’와 다른 기준도 많았다. 용맹과 전투능력, 주군에 대한 충성, 위험을 감수하는 태도처럼 전쟁사회에서 중요한 덕목이 큰 비중을 차지했다. 오늘의 기업에서 사용하는 직무역량표를 그대로 들고 초원으로 갈 수는 없다. 다만 하나의 변화는 분명히 읽을 수 있다.

사람의 가치가 ‘누구의 아들인가’만으로 완전히 결정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5. 자무카의 사람들도 넘어왔다

테무진의 인재풀이 넓어진 과정은 자무카와의 관계에서도 드러난다. 두 사람은 한때 안다를 맺은 가까운 사이였지만 함께 지내던 세력은 결국 갈라졌다. 『몽골비사』에서는 어느 날 자무카가 이동 중에 남긴 말을 두고 테무진과 보르테가 그 의미를 논의하는 장면이 나온다. 보르테는 자무카가 자신들과 거리를 두려 한다고 해석했고 테무진 쪽 사람들은 그날 밤 자무카와 떨어져 이동한다.

이후 두 사람은 경쟁자가 되었다.

여기에서 중요한 변화가 생겼다. 원래 자무카 쪽에 있었던 일부 사람들이 테무진에게 합류하기 시작했다. 왜 그랬는지는 사람마다 달랐을 것이다. 테무진의 리더십만으로 모두 설명할 수 없다. 초원의 세력관계가 변했고 어느 편에 서는 것이 생존과 이익에 유리한지를 계산한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강해지는 지도자에게 사람이 몰리는 것은 어느 시대에나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러나 테무진 입장에서는 다른 문제가 생긴다. 어제까지 다른 지도자를 따르던 사람에게 어디까지 역할을 줄 것인가. 혈연과 오래된 관계만을 기준으로 했다면 선택은 간단했을 것이다. 새로 온 사람은 주변부에 두면 된다. 하지만 그렇게 했다면 조직은 기존 구성원의 역량을 넘어 성장하기 어려웠을 가능성이 크다.

테무진은 새로 들어온 사람들을 완전히 같은 방식으로 대하지는 않았지만 그들 가운데 쓸 만한 사람에게 역할을 부여했다. 훗날 그의 군대에는 여러 씨족과 과거 적대세력 출신 인물들이 함께 들어가게 된다. 그 변화가 이후 자무카와 테무진의 조직을 갈라놓는 중요한 차이 가운데 하나가 된다.

6. 익숙한 사람과 필요한 사람

오늘의 HR에서는 조직이 필요로 하는 인재를 찾고 선택하는 과정을 Talent AcquisitionSelection 같은 용어로 설명한다. 어떤 직무에 어떤 역량이 필요한지를 정하고 후보자의 경험과 역량을 평가해 적합한 사람을 선택한다. 테무진이 이런 현대적 인사체계를 운영했다고 볼 수는 없다. 그의 사람 선택은 훨씬 개인적이었고 전쟁과 정치 상황에 좌우됐으며 충성이라는 기준이 절대적으로 중요했다. 혈연과 혼인도 끝까지 중요한 권력자원이었다.

그럼에도 그의 세력이 성장하면서 나타나는 하나의 패턴은 오늘의 작은 회사에서도 생각해볼 만하다. 처음에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회사의 제도도 없고 업무도 수시로 바뀌는 창업 초기에는 대표와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람이 오히려 유리할 때가 있다. 서로 말하지 않아도 움직이고 어려울 때 떠나지 않을 가능성도 높다.

그러나 사업이 커지면 필요한 능력이 달라진다. 친한 사람 가운데 재무 전문가가 없으면 외부에서 찾아야 하고 해외영업을 해본 사람이 없다면 처음 보는 사람에게도 중요한 일을 맡겨야 한다. 이때 조직이 익숙함만을 기준으로 사람을 고르면 과거의 신뢰가 미래의 역량을 대신하기 시작한다.

반대로 경력과 능력만 보고 사람을 들여오면서 기존 구성원들이 쌓아온 관계와 신뢰를 아무 가치 없는 것으로 취급해도 문제가 생긴다. 초기 조직을 만든 사람들에게 회사는 단순한 직장이 아닐 수 있고 이들의 암묵적인 지식과 관계 역시 조직의 자산이다.

따라서 사람을 고르는 문제는 ‘의리냐 능력이냐’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문제가 아니다. 조직이 성장할수록 중요한 것은 사람을 바라보는 기준을 넓히는 일이다.

누구와 친한가뿐 아니라 무엇을 해낼 수 있는가를 보고, 무엇을 해낼 수 있는가뿐 아니라 그 사람에게 중요한 일을 맡겼을 때 조직이 신뢰할 수 있는가를 함께 보는 것이다.

테무진의 조직 역시 하루아침에 혈연조직에서 능력조직으로 바뀐 것이 아니었다. 친족과 동맹, 노코르와 새로 합류한 사람들이 뒤섞인 상태에서 조금씩 더 넓은 사람들을 중요한 역할에 사용할 수 있는 집단으로 변해갔다.

그 과정은 곧 새로운 갈등을 만들어냈다. 혈통과 신분, 오래된 관계를 중시하는 사람들과 테무진 주변에 새롭게 모여든 사람들은 같은 초원에서 서로 다른 질서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차이는 한때 안다였던 자무카와의 경쟁 속에서 더욱 선명해진다.

7. 다시 우리 회사로

직원 마흔 명인 그 제조기업의 대표가 오래 함께한 사람을 믿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어려운 시절을 같이 견딘 시간은 경력기술서로 측정할 수 없는 자산이고 조직이 위기를 만났을 때 그 관계가 회사를 지탱할 수도 있다.

하지만 회사가 성장했다는 것은 해야 할 일이 달라졌다는 뜻이기도 하다. 예전에 필요했던 사람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필요한 역할이 달라질 수 있다는 뜻이다.

테무진도 자신의 형제와 친족을 버리고 낯선 사람들만 데리고 제국을 만든 것이 아니다. 기존의 혈연질서를 이용하면서 동시에 그 밖의 사람들에게도 역할을 열었다. 보오르추와 젤메 같은 초기 동료에서 시작한 관계망은 시간이 지나면서 여러 출신의 사람을 포함하는 세력으로 넓어졌다.

누구를 믿을 것인가라는 질문만으로 운영되던 집단에 누가 이 일을 해낼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하나 더 붙은 셈이다.

그 두 질문이 서로 다른 답을 가리킬 때부터 경영자의 사람 보는 기준이 시험받기 시작한다.

우리 조직에서 사람을 고르는 기준은 실제 능력과 역할일까, 아니면 여전히 익숙함과 친분에 더 가까울까.


영준
유영준
일과 사람을 잇는 한량
일과 사람을 잇는 한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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