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아이가 18개월쯤 되었을 때, 가족과 함께 스페인과 남프랑스로 여행을 떠난 적이 있습니다.
깐느의 한 식당에서 굴 요리와 로제 와인의 맛에 한창 취해 있을 무렵, 옆자리에 계시던 금발의 러시아 할머니 한 분이 다정하게 말을 건네오셨습니다. 저희 부부가 낯선 불어로 쩔쩔맬 때 유창하게 주문을 도와주시더니, 어느새 합석한 것처럼 깊고 따뜻한 대화가 이어졌죠.
대화가 무르익을 즈음, 할머니는 저희 첫째를 물끄러미 바라보시며 당신의 아들 이야기를 꺼내셨습니다. 아이가 어릴 때 디즈니랜드를 무려 7번이나 데려갈 정도로 정성을 쏟았지만, 런던에서 회계사로 장성한 아들은 정작 단 한 번의 디즈니랜드도 기억하지 못하더라고요. 그러니 깐느에 온 이 작은 아이도 지금 이 순간을 전혀 기억하지 못할 테니, 아이들에게 너무 완벽하게 해주려 애쓰지 말라는 진심 어린 조언이었습니다.
그때는 그 말씀이 참 크게 와닿았습니다. (물론 아이들이 혹시나 좋아할까 싶어 그 후로도 디즈니랜드를 두 번이나 가버렸고, 미국, 태국, 대만, 일본 등 부지런히 여행을 다녔지만요.)
그런데 이번 추석 명절에 떠날 보홀 여행을 준비하던 중, 문득 그 할머니가 다시 떠올랐습니다. 갓 태어난 셋째의 아주 작은 물놀이 튜브와 수영복을 고르며 혼자 함박웃음을 짓는 저를 보고, 아내가 웃으며 그때 그 할머니의 조언을 다시 꺼냈거든요.
"애들은 어차피 하나도 기억 못 한다는데 뭘 그렇게 신나서 골라?"
하지만 8년 전과 지금의 저는 조금 달라져 있었습니다. 세 아이의 아빠로 살아오며 단단해진 탓일까요? 만약 지금 다시 깐느로 돌아가 그 할머니를 만난다면, 오늘 아내에게 건넨 대답을 그대로 들려드릴 것 같습니다.
"아이들은 기억 못 해도, 내가 기억하잖아."
이 짧은 깨달음은 제가 매일 마주하는 비즈니스 현장과 리더십의 본질에도 그대로 맞닿아 있습니다.
기업에서 리더로 일하다 보면, 구성원의 성장을 위해 밤낮으로 고민하고 애정을 쏟았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직원들은 그 노력을 알아주지 않아 섭섭한 순간들을 참 많이 겪게 됩니다. 조직문화 워크샵이나 코칭 현장에서 수많은 리더분들을 인터뷰하다 보면, 그 서운함에 지쳐 결국 마음의 문을 닫고 차갑게 흑화해 버린 분들도 적지 않게 보게 됩니다.
하지만 타인에게 어떻게 기억되는가도 중요하지만, 어쩌면 더 중요한 것은 내가 나를 기억하는 방식 그리고 그 순간을 내가 얼마나 온전히(fullest) 살아냈는가일지도 모릅니다.
차가운 숫자와 단기적인 업무 성과는 마치 사진처럼 한순간의 기록으로 남겨지지만, 누군가를 위해 온 마음을 다했던 리더십의 과정은 더 길고 깊은 추억으로 남아야 한다고 믿습니다.
제가 종종 아이들에게 해주는 말이 하나 있습니다. 아직 너무 어려서 그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진 못하겠지만요.
"혼자 하면 단순한 기억이 되지만, 함께하면 추억이 된다."
우리가 치열하게 부딪히는 회사 생활 역시 훗날 부질없는 흑역사나 건조한 기억으로 남기지 않으려면, 결과나 남들의 인정에만 연연하기보다 지금 내 곁의 동료들과 마음껏 그 순간을 함께 즐겨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