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과관리 워크숍이 끝나고 회의실을 나서다 화이트보드를 한 번 더 돌아봤다.
세 시간 동안 오간 말 중에 남아 있는 건 세 줄이었다. 성과의 요인은 1. 개인의 역량. 2. 동료의 역량 : 협조와 지원. 3. 조직의 역량 : 시스템과 문화다. 두 번째와 세 번째 줄에는 콜론 뒤에 답이 붙어 있었는데 첫 줄만 비어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비어 있지 않았다. 누군가 그 자리에 물음표를 하나 찍어두었다. 어느 팀장이 물음표를 썼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나는 사진을 한 장 찍고 나왔고, 며칠이 지나도록 그 물음표가 계속 걸렸다.
나는 조직개발을 시스템의 언어로 다루는 사람이다. 성과가 안 난다는 말을 들으면 사람보다 구조를 먼저 본다. 그게 직업적 습관이기도 하고 오래 지켜온 신념이기도 하다. 영업 실적이 나오지 않는다며 시작한 진단이 결국 의사결정 권한이 본부장 한 사람에게 몰려 있어서, 담당자가 고객 앞에서 아무 약속도 못 하는 구조 때문이었던 적이 있다. 팀 간 협업이 안 된다던 조직에서는 협업의 의지가 아니라 정보가 부서 경계에서 끊기는 지점이 문제였다. 개인의 역량 문제로 정리되어 있던 것들이 조금만 들여다보면 대개 다른 이름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저 화이트보드의 아래 두 줄은 어렵지 않게 답이 적힌다. 조직의 역량은 시스템과 문화로 번역된다. 성과관리 제도가 무엇을 측정하고 있는지, 권한위임 체계가 어디까지 내려와 있는지, 정보가 어느 선에서 멈추는지, 그리고 그 위에 쌓인 일하는 방식이 어떤 모양인지. 동료의 역량도 협조와 지원으로 번역된다. 옆자리 사람이 내 일을 자기 일의 연장으로 보는가, 아니면 넘어오면 곤란한 일로 보는가, 이건 사람 됨됨이의 문제라기보다 그 조직에서 협조가 어떻게 취급되어 왔는지의 문제에 가깝다.
문제는 첫 줄이다. 개인의 역량! 지식과 기술과 태도라고 적으면 되지 않나? 역량모델링 프로젝트를 하면서 몇 번이나 적어본 단어들이다. 그런데 그 답을 적으려고 하면 매번 손이 멈춘다. 같은 사람이 조직이 바뀌면 완전히 다르게 일하는 걸 여러 번 봤기 때문이다. 앞 직장에서 관리가 필요한 사람으로 분류되던 이가 옮긴 곳에서 핵심 인재가 되는 데 걸린 시간은 반년 남짓이었다. 그 사이에 그의 지식이 늘었을 리 없고 기술이 새로 생겼을 리도 없다. 그렇다면 개인의 역량이라는 건 성과의 원인이라기보다 결과 쪽에 더 가까운 무엇일지도 모른다.
여기까지 오면 시스템형 OD를 하는 사람의 결론은 사실 정해져 있다. 개인은 변수가 아니니 조건을 바꾸라는 것. 나도 오랫동안 그렇게 말해왔고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게 말한다. 그런데 그 말이 다 맞는데도 현장에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순간이 있다. 제도를 새로 깔고 평가 기준을 손보고 회의체를 정리해두었는데도 조직이 그냥 조용한 경우, 권한을 아래로 내려줬는데 아무도 그 권한을 쓰지 않는 경우, 설계가 잘못된 건 아닌가 싶어 몇 번을 다시 들여다봐도 도면상으로는 멀쩡한데, 그 안에서 사람들이 움직이지 않는다.
그 화이트보드 오른쪽에 작은 글씨로 세 단어를 더 적었다. 마음, 괄호 열고 느낌과 생각, 그 아래 철학, 다시 사람, 괄호 열고 변화, 워크숍 중반에 누군가 질문에 갑자기 적게 되었다. 느낌과 생각이 쌓여 철학이 되고, 철학이 생기고 나서야 사람이 바뀐다는 순서였다. 며칠 뒤에 사진을 다시 열어보다가, 첫 줄의 빈칸에 들어갈 말이 어쩌면 저 구석에 이미 적혀 있었던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역량이 아니라 마음이라고 하지만 이 말은 조심해서 해야 한다. 마음가짐을 성과의 요인으로 지목하는 순간, 그건 다시 가장 오래된 방식의 개인 탓하기가 되기 때문이다. 열정이 부족하다, 주인의식이 없다, 요즘 애들은 절실함이 없다. 조직이 자기 몫의 문제를 개인에게 넘길 때 늘 쓰는 청구서다. 마음이라는 단어는 이 청구서 위에 올려두는 순간 아무 쓸모가 없어진다.
사람은 조건 없이 협력하지도, 언제나 이기적이지도 않다. 조건이 갖춰지면 협력하고 조건이 무너지면 조용히 발을 뺀다. 마음도 정확히 그렇게 움직인다. 내가 들인 노력이 제도 안에서 제대로 읽혔다는 경험, 옆 사람이 나를 이용하지 않았다는 확인, 손을 들었을 때 불이익이 오지 않았다는 기억, 이런 것들이 몇 번 반복되고 난 다음에야 마음이 일어난다. 마음은 요구해서 생기는 게 아니라 조건이 만들어질 때 뒤늦게 따라오는 것이다.
실제 인과는 반대 방향으로 흐른다. 조직이 시스템과 문화를 만들고,
그 안에서 동료들이 협조와 지원을 주고받고, 그 경험이 쌓인 다음에야 개인의 마음이 움직인다
그렇게 보면 저 세 줄은 순서가 거꾸로 적혀 있는 셈이다. 우리는 늘 개인의 역량부터 적고, 그걸로 설명이 안 되면 동료를 보고, 마지막에야 조직을 본다. 실제 인과는 반대 방향으로 흐른다. 조직이 시스템과 문화를 만들고, 그 안에서 동료들이 협조와 지원을 주고받고, 그 경험이 쌓인 다음에야 개인의 마음이 움직인다. 첫 줄의 물음표는 답이 없는 자리가 아니라 맨 마지막에 채워지는 자리였다.
그리고 그 자리는 컨설턴트가 대신 채워줄 수 없다. 구조와 프로세스를 다시 짜고 제도의 앞뒤를 맞춰두는 데까지가 내 몫이고, 그 안에서 마음이 일어나는지 아닌지는 거기서 매일 일하는 사람들의 몫이다. 이걸 인정하는 데 시간이 꽤 걸렸다. 잘 진단하고 잘 설계하면 사람은 따라오게 되어 있다고 믿던 시기가 나에게도 있었다.
그날 워크숍이 다 끝나고 사람들이 다 나간 뒤에, 팀장 한 사람이 나가다 말고 돌아서서 그 세 줄을 한참 봤다. 마커를 집어 들었다가 뚜껑도 열지 않고 그냥 내려놓고 나갔다. 나는 그 뒷모습을 보면서, 저 사람이 답을 몰라서 못 적은 건 아닐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화이트보드는 지우지 않고 나왔다.
